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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친코’ 신화 thebell note

고설봉 기자공개 2022-08-03 07:38:56

이 기사는 2022년 08월 02일 08:17 thebell 유료서비스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이민진의 소설 ‘파친코’ 첫 문장은 위로와 감동으로 다가왔다. 애플TV를 통해 파친코를 본 뒤 다시 원작 소설책으로 볼 때 느껴지는 감정은 여운이 길었다. 어떤 순간 가슴엔 소용돌이가 일고 눈가엔 눈물이 맺혔다.

가슴 속 먹먹함의 근원지는 1933년 일본 오사카 이카이노였다. 이카이노는 한국인들이 모여사는 빈민가였다. 동물의 악취와 사람 찌든내가 허름한 판잣집을 짓누르는 곳이었다. 인분과 돼지 배설물과 빗물이 섞인 좁은 통로를 따라 남루한 조선인들의 삶은 이어졌다.

시간은 1970년대로 이동한다. 재일교포 2세대 모자수는 파친코를 운영해 큰 돈을 모았다. 그는 아들 솔로몬만큼은 일본에서 사람 대우 받으며 살게 하려고 미국 유학을 보냈다. 미국에서 아이비리그를 졸업한 솔로몬은 뉴욕 맨해튼에서 성공한 금융인으로 살았다.

그러나 일본에 돌아온 솔로몬 앞엔 높은 장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재일교포인 그에게 일본사회는 장벽을 치고 배척했다. 그의 학벌과 부모의 재력도 장벽을 넘어설 수 있는 지렛대는 되지 못했다. 솔로몬은 결국 금융가의 뜻을 접고 아버지처럼 파친코 사업을 벌였다.

재일교포들의 삶은 철저히 외면받았다. 일본에선 그들을 인간 이하 취급했다. 한국에선 그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기 꺼려했다. 재일교포들은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채 세월을 견뎠다. 소설보다 더 냉혹한 현실이었다.

하지만 재일교포들에겐 희망과 의지가 있었다. 할수 있는 일을 찾아 멸시와 천대를 견디며 돈을 모았다. 부를 축적하고 동시에 재일교포 사회라는 견고한 성을 쌓았다.

1980년대 재일교포 사회는 곳간에 쌓았던 자본을 한국으로 이전시키기 시작했다. 이희건 신한은행 명예회장은 1974년 재일 상공인들의 모국투자 활성화를 위해 재일한국인본국투자협회를 만들어 활동했다.

이 명예회장은 1982년 일본 전역 341명의 재일교포 주주들로부터 출자금을 모집해 한국 최초 민간 시중은행인 신한은행을 설립했다. 이후 신한증권·신한종합연구소·신한생명보험 등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며 성장 기반을 다졌다. 그 토대 위해 신한금융그룹이 세워졌다.

창업 40주년을 맞은 올해 신한금융은 리딩금융 반열에 올랐다. 위상에 걸맞는 역할도 성실히 수행하고 있다. 코로나19로 위협받는 서민과 소상공인들의 버팀목 역할을 하고 있다. 전 금융권 가운데 가장 많은 약 54조원의 정책자금을 지원하며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한 축으로 성장했다.

어찌보면 재일교포들은 조국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불행을 다른 이의 탓으로 돌리지 않았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위로하며 척박한 환경에서도 믿음과 의지로 삶을 개척했다.

ESG 경영이란 말이 일상화된 요즘, 그럼에도 누구도 명쾌하게 ESG 경영을 정의 내리지 못한다. 실체가 불분명하지만 한가지 큰 줄기는 조직의 방향성과 개인의 역량이다. 재일교포들의 본국투자가 ESG 경영의 초석은 아닐까. 짓밟힌 삶에서 금융보국의 꿈을 이룬 이 명예회장을 비롯한 재일교포 원로들에게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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