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5년 12월 11일 13:2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인사철이다. 주변에 퇴직자가 줄을 잇는다. 형님들과 또래는 물론 더 어린 사람들까지 집으로 간다. 나도 나이를 먹었다는 얘기다. 언제 닥쳐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다. 전에는 윗사람들과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퇴직을 해서 그냥 그런가보다 했다. 지금은 나랑 교류하고 비즈니스를 하던 이들이다. 마음이 더 짠하다.뉴스에는 퇴직하는 사람은 안보이고 승진, 전보 인사만 넘쳐난다. 새로 임원으로 승진해 '별'을 다는 사람들에게는 축하전화와 문자, 화환이 줄을 잇는다. 물 먹고 좌천된 사람 이야기도 있지만 퇴직자에 비할 바는 아니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사람과 쓸쓸히 짐을 챙겨 회사를 떠나는 사람이 엇비슷하다. 퇴직자가 더 많은 곳도 꽤 있다.
시절이 하수상해서일까. 때마침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란 드라마가 화제였다. 현실과 드라마는 사실 많이 다르지만 그 또래의 분위기, 이미 지나온 과거의 경험으로 볼때 울림이 있다는 얘기다. 이 드라마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캐릭터는 명세빈 같은 마누라와 고창석 같은 형님이란 우스갯소리도 있다. 암튼 많은 이들이 최소 하나 이상의 씬(장면)과 인물에 자신을 대입시켜 울고 웃었다.
올해 퇴직을 통보받은 몇몇 대기업 임원과 만나 식사를 하거나 통화를 했다. 고생 많았다는 덕담과 함께 이제 뭘 할꺼냐고 묻는다. 전이나 지금이나 대답은 비슷하다. 아직 잘 모르겠단다. 일단 쉬면서 생각해 볼 참이다. 생각해 보니 별로 할 줄 아는 것도 없다. 특히 기술을 다루지 않는 사무직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놀 것도 놀 줄 아는 것도 별로 없다. 그 비싼 골프는 대개 비즈니스를 위해 법카(법인카드)로 했고 먹고 마시는 것도 비싸고 좋은 것은 역시 법카가 해결해줬다. 설렁탕 '보통'은 개카(개인카드), '특'은 법카란 농담도 있다. 막상 내 돈을 쓰려니 손이 떨린다.
서울에 '자가'를 갖고 심지어 강남에 수십억원짜리 아파트가 있는데 가난(?)하다. 돈(재산)이 없는게 아니라 쓸 줄 모른다. 써보지 않았다. 평일에 어디 한 곳에 모여 한 차로 멀리 싼 골프장으로 몰려간다. 차도 안갖고 다닌다. 저녁마다 반주를 하고 법인대리를 불러 집으로 갔는데 지금은 일행들 몰래 버스 지하철 막차 시간을 검색한다.
돌이켜보면 내 자신보다 체면을 더 생각했다. 내가 맛있고 좋아하는게 아니라 남들이 맛있다는 걸 먹었다. 추천하는 맛집을 궁금해 하고 기회가 되면 찾아갔다. 윗사람이건 비즈니스 파트너건 지인이건 상대방이 좋아할만한 것을 골랐다. 해장이 필요해도 비싼 고기를 먹었다. 사실 칼국수가 더 당겼는데.
이제라도 퇴직자들이 잘하는거를 하고 먹고 싶은거를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갔으면 좋겠다. 여행을 가도 남이 짜주는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이 더 낫다. 하지만 역시 나도 모르게 돈과 시간, 일행의 취향 등을 생각하며 패키지 상품을 쳐다본다. 내가 잘 하는 것, 좋아하는 일, 가고 싶은 곳을 까먹은 것 같다. 와인을 폼나게 먹으면서도 내가 진짜 와인을 좋아하나 이런 의문이 드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행복해야 하는데 남들이 나를 행복하다고 생각하길 바란다. 그렇게 자신을 잘 모르면서 자식들한테는 니들 하고 싶은거 잘하는거 좋아하는거 하고 살라고 한다. 나는 이번 생에 글렀으니 니들은 나처럼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무의식적인 자기고백 같다. 재산은 내가 가진 만큼이 아니라 내가 쓰는 만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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