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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그룹이 지불한 '1000억' 수업료

김일문 M&A부 부장공개 2019-05-10 08:54:28

이 기사는 2019년 05월 09일 08:08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단 한번의 강의에 1000억원이 넘는 수업료를 지불해야 하는 특강이 있다고 치자. 복잡하거나 대단한 기술을 전수하는 내용도 아니다. OX문제 만큼이나 지극히 단순하고 간단하다. 아무리 화수분을 가진 부자라도 선뜻 돈을 지불할 용기를 내기는 쉽지않다. 하지만 그 특강이 기업의 명운을 좌우하는 중차대한 의사결정에 대한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적어도 한화그룹은 그 값비싼 수업료를 톡톡히 치른 곳 가운데 하나다.

11년전인 2008년 4월 한화그룹은 대우조선해양 인수를 공식화했다. 예상 매각가격만 6조원 이상이었던 이 초대형 매물에 시장은 열광했다. 조선업이 호황이던 당시만 하더라도 대우조선해양의 위상은 그야말로 하늘을 찌를 정도로 대단했다. 글로벌 조선 빅3라는 네임벨류와 희소가치만으로도 인수할 만한 명분이 충분하다는 인식이 대다수였고, 이는 치열한 경쟁으로 이어졌다.

한화그룹 뿐만 아니라 포스코가 GS그룹과 컨소시엄을 구성해 인수의향을 밝혔고, 현대중공업도 뛰어들었다. 한화그룹은 계열 생명보험사인 대한생명(현 한화생명) 지분을 팔아 인수대금을 만들겠다고 공표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3파전 양상으로 흘러가던 대우조선해양 M&A는 GS그룹이 본입찰 직전 돌연 불참 의사를 나타내며 포기했고, 결국 같은해 10월 한화그룹이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되면서 막을 내리는 듯 보였다.

순탄하게 흘러가던 M&A는 한화그룹이 인수대금 납부 연기를 요청하면서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급기야 이듬해 1월 인수 포기를 선언하면서 이행보증금 3000억원을 날릴 위기에 처했다. 10년에 가까운 지루한 법정공방 끝에 2000억원 정도는 다시 되돌려 받을 수 있었지만 1000억원은 허공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자. 한화그룹이 대우조선해양을 그대로 인수했더라면 현재의 사세를 그대로 유지할 수 있었을까. 최악의 상황을 가정할 경우 그룹이 해체될 위기까지 내몰렸을 것이 뻔하다. 상상만해도 아찔하다. 따라서 한화그룹에게 이행보증금 1000억원은 아까운 돈이라기 보다는 수렁에서 건져준 고마운 수업료다.

한화그룹이 아시아나항공 인수를 검토하지 않고 있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한화그룹 정도면 아시아나항공을 인수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일말의 가능성 조차 무참히 뭉개버린 냉정한 답변이었다. 아시아나항공이 매물로 나오면서 시장은 한화그룹을 유력한 인수 후보로 지목했지만 사실 M&A에 유연한 자세를 취해왔다는 그간의 행보를 감안, 개연성에 근거한 추측일 뿐 실제로 관심을 나타낸 것은 아니었다.

더욱이 금호그룹이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연달아 인수한데 따른 오랜 후유증으로 결국 주력 회사인 아시아나항공까지 내놓은 것을 목도한 상황에서 선뜻 인수를 검토하기 꺼려지는 매물로 평가했을 공산이 크다. 국내 2위 국적항공사라는 메리트를 빼면 그다지 매력적인 매물도 아니다. 무리한 M&A로 기업을 집어삼키며 사세 확장에 나서던 시대는 끝났다. 1000억원짜리 특급 과외를 받은 한화그룹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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