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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의 글로벌 오토게임]포르쉐와 포르쉐패밀리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19-07-29 08:08:00

이 기사는 2019년 07월 22일 10: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포르쉐는 페르디난트 포르쉐(Ferdinand Porsche: 1875∼1951)가 창업한 회사다. 페르디난트 포르쉐는 다임러 경영진 출신인데 다임러와 벤츠가 합병하자 회사를 떠나 1931년에 슈투트가르트에서 창업했다. 1938년부터는 폭스바겐 CEO도 겸했다.

독일 정부가 설립한 폭스바겐과는 달리 포르쉐는 전형적인 개인기업, 가족기업에서 출발했다. 창업 시에는 포르쉐가 80% 지분을 가졌고 변호사 사위인 안톤 피에히(Anton Piech)가 10%, 나머지 10%는 카레이서 로젠버거가 가졌다. 1937년에는 아들 페리(Ferry Porsche: 1909∼1998) 15%, 사위 피에히 10%, 딸 루이제(Louise Porsche, 1904∼1999) 5%로 지분을 조정했다.

오늘날의 포르쉐는 포르쉐지주회사(Porsche Automobile Holding SE)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이 지주회사가 폭스바겐의 53.1% 지분을 가진다. 따라서 포르쉐와 폭스바겐은 직접적인 지분 관계에 있지는 않다.

포르쉐지주회사는 다시 포르쉐와 피에히 가족 구성원들이 보유한 50%의 보통주와 기관투자자 25%, 개인투자자 25%를 포함하는 50%의 일반 주주들이 보유한 상장우선주의 소유구조로 형성되어 있다. 포르쉐지주회사 및 포르쉐의 이사회 의장은 페리 포르쉐의 막내아들인 볼프강 포르쉐(Wolfgang Porsche)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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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쉐가와 피에히가의 사람들은 모든 면에서 상극이다. 페리 포르쉐와 루이제 포르쉐는 어렸을 때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아이들도 사이가 멀었다. 페리가 회사를 경영할 당시부터 두 가족 구성원들 간 충돌은 극심했다. 독일 ZDF 방송이 포르쉐패밀리 분쟁을 주제로 다큐멘터리를 제작했을 정도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970년에 페리 포르쉐는 일종의 ‘집단요양' 목적으로 2차대전 때 가족이 머물렀던 한 섬으로 양가 구성원 모두를 불러 모았는데 여기서 기대와는 정반대의 결과가 나오고 말았다. 그 섬에서 사람들이 거의 극한 상황으로 다투는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그 결과 가족은 모두 회사를 떠나기로 합의했다.

당시 루이제 포르쉐와 안톤 피에히의 3남 페르디난트 피에히(Ferdinand Piech)는 포르쉐의 R&D를 책임지고 있었으나 이 합의에 따라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아우디의 CEO를 거쳐 폭스바겐의 CEO, 이사회 의장이 되었다. 포르쉐 911의 디자이너 페르디난트 포르쉐(조부와 이름이 같다)는 따로 창업을 했다(Porsche Design Studio).

이름이 다르다는 것이 가족간 반목과 승계에 문제였든지 한 컨설턴트가 페리 포르쉐에게 페르디난트 피에히를 입양하라고 권고한 일까지 있다고 한다. 외손자들은 단지 외손자여서 신비한 이름인 포르쉐 이름을 갖지 못했고 이 점이 서로 간에 거리가 멀어진 이유 중 하나였다. 포르쉐 쪽은 기분이 나쁘면 언제나 이름을 들먹였다고 한다.

두 패밀리 사이의 반목은 대를 내려온 것이기는 하지만 페르디난트 피에히가 그 중심인물인 것으로 보인다. 페르디난트 피에히는 1937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출생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하기 한해 전이다. 스위스 최고의 명문인 츄리히공대를 졸업했다.

피에히는 조부의 성격을 물려받아 어떤 댓가를 치르고라도 최고의 성과를 내고 싶어 한 사람이다. 회사의 발전을 위해 가족들을 무시했고 가족들에게 섭섭한 말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 가족회합에서는 자신만이 투사이고 나머지는 모두 ‘집에서 기르는 돼지'와 다름없다는 심한 말까지 했다고 한다.

피에히는 아우디로 가서 아우디의 발전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콰트로, 아우디100 같은 차를 성공시켜 아우디를 BMW와 다임러 급으로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1993년에 폭스바겐의 CEO로 취임했을 때 회사는 도산 3개월 전이었다. 회사를 위기에서 구해내고 세계 최대의 자동차회사로 변모시킨다. 폭스바겐의 많은 브랜드는 피에히가 인수한 것들이다. CEO는 65세에 퇴임한다는 폭스바겐의 내부 규정 때문에 2002년에서 2015년까지는 이사회 의장으로 있었다.

피에히는 기술과 기업경영 양면에서 탁월했다. 일론 머스크와도 종종 비교된다. 그러나 독단적인 스타일 때문에 폭스바겐의 기업문화는 민주적이지 못해 후일 배기가스 조작사건 같은 것이 일어났다는 것이 중론이다. 피에히는 포르쉐지주회사 지분의 10%를 보유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피에히는 결혼을 세 번 했는데 혼외자 둘을 포함 자녀가 열둘이다. 포르쉐의 미래 지배구조가 더 복잡해질 수도 있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포르쉐는 1972년에 페리 포르쉐를 이사회 의장으로 기업을 공개했다. 그러나 포르쉐는 가족기업이지만 1970년의 가족합의에 따라 전문경영인이 경영하는 회사가 되었다. 현재 CEO는 1968년생인 올리버 블루메다.

포르쉐가 매출의 절반을 기록하는 미국시장에서의 슬럼프로 도산위기에 처했던 1992년에 벤델린 비데킹(Wendelin Wiedeking)이 CEO로 취임했는데 비데킹은 도산위기의 회사를 살려내고 성공적으로 경영해서 독일 최고연봉 CEO가 된 인물이다. 후일 폭스바겐 적대적 M&A 실패로 회사를 떠나면서도 독일 최고액 퇴직금을 받았다.

아헨공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1983년에 입사한 비데킹은 1993년에서 2009년까지 무려 16년 동안 회사를 이끌었다. 서른 살에 부동산투자로 거액을 버는 재주를 보였던 마흔살의 신임 CEO 비데킹은 회사를 철저히 수익기준으로 운영했다. 종업원들에게 가혹했고 도요타자동차를 철저히 벤치마크해서 모든 공정에 군더더기를 없앴다. "회사는 돈을 버는 곳이지 취미 생활하는 곳이 아니다"는 말도 남겼다. 취임 시 3억 유로였던 회사의 시총은 2007년에 250억 유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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