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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칼 아이칸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19-10-07 10:00:00

이 기사는 2019년 10월 07일 10: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내가 재산이 한 20조 원쯤 되는 억만장자이고 나이가 70에 접어들었다면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을까? 이제 일은 그만두고 좋은 곳 찾아다니며 잘 쉬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재산과 나이에 관계없이 하던 일을 그냥 계속 열심히 하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워렌 버핏(89)이 그렇다. 올해 83세인 칼 아이칸(Carl Icahn)도 마찬가지다. 라자드가 집계한 2019년 상반기 행동주의 펀드 순위에 아이칸은 6위에 올랐다. 언제 적 아이칸인가. 아직도 여전히 활동적이고 공격적이다.

현재 세계적인 현상인 주주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의 원조는 이른바 레이더(Raider)들이다.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한 이들은 ‘기업 사냥꾼'이라는 별로 느낌이 좋지 않은 이름으로 불렸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 행동주의 펀드들은 적대적 M&A 위협을 주무기로 사용했었다.

아이칸과 동시대 레이더들 중에는 커크 커코리언, 사울 스타인버그, 분 피킨스 같은 거물들이 있었는데 이제 모두 타계했다. 77세인 트라이언의 넬슨 펠츠 정도가 아직 활동 중이다.

아이칸은 국내에서는 2006년 KT&G 공격으로 알려져 있는 정도지만 1986년 US스틸, 2006년 타임워너, 2009년 야후, 2013년 델컴퓨터, 2014년 이베이 등 굴지의 기업들을 상대로 적대적 M&A나 경영간섭을 펼쳤다. 약 40년 동안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글로벌 자본시장에서 존재감을 유지해 왔다.

김화진

아이칸은 뉴욕의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프린스턴대학을 졸업하고 뉴욕대 의대에 진학했는데 2년 후에 그만두고 연방예비군에 입대했다. 군복무를 한 후 1961년에 뉴욕에서 주식중개인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1968년에 리스크 아비트라지와 옵션거래에 특화된 증권회사를 차렸다. 기업의 지분을 매집해서 행동주의를 시작한 것은 1978년이다.

1985년에 항공사 TWA를 적대적으로 인수하면서 세간에 잘 알려지게 되었다. 아이칸은 차입금을 상환하기 위해 TWA의 자산을 차곡차곡 매각했는데 거기서 ‘자산수탈'(asset stripping)이라는 용어가 생겼다. 1988년에 TWA를 상장폐지시키고 아이칸은 4억7천만 달러의 수익을 챙겼다. TWA에는 5억4천만 달러의 채무를 남겼다. 평판이 나빠졌고 1990년작 영화 ‘프리티 우먼'은 레이더의 그런 행태를 비판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2006년에 아이칸이 KT&G를 공격했을 때 생긴 전설 같은 이야기가 있다. 아이칸은 회사측과 위임장 대결을 벌이게 되었는데 어느 날 한 자산운용사의 신입사원이 직접 아이칸의 전화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이칸은 그 사원에게 자기 측 논리를 자세히 설명하고 지원을 부탁했다고 한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당시 70세였던 아이칸은 그 회사 사장부터 신입사원까지 모두 40명 정도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렸다는 것이다. 부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고 다들 고개를 저었다.

당시 아이칸은 2대 주주가 된 다음 배당확대, 유휴 부동산의 매각, 한국인삼공사 상장, 영진약품 매각 등등의 요구를 펼쳤고 회사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적대적 M&A 위협까지 내놓았다. 이사회에 자기 측 인사 1인을 진출시키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본격적인 주주행동주의가 첫선을 보인 셈이어서 회사 측의 대응은 미숙했다.

아이칸은 10개월 만에 시세차익으로 1천억 원을 벌고 철수해버렸다. 아이칸이 떠나고 나서 국내에서는 ‘악성 투기자본'의 적대적 M&A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제도개선 논의가 폭발했다. 그 전에 SK를 공격했던 소버린이 초등학생이면 아이칸은 대학생인데 앞으로 대학원생들이 오는데 대비해야 된다는 비유도 성행했다.

어쨋거나 아이칸은 국내 기업들과 자본시장에 일찌감치 주주행동주의 예습을 시켜준 셈이다. 시간이 흘렀고 헤지펀드 행동주의의 글로벌 지존인 대학원생 엘리엇이 삼성과 현대차를 공격했다. 엘리엇이 성공하지 못한 것은 아이칸 학습효과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75세이지만 원조 레이더 출신은 아닌 폴 싱어가 이끄는 엘리엇은 작년에 22건, 올해 상반기에 6건의 행동주의를 새로 시작해서 업계 선두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칼 아이칸은 "어떤 사람들은 AI를 연구해서 부자가 되지만 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연구해서 돈을 번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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