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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재벌시스템]삼성 제국 완성한 오너십 '레거시'①비서실부터 미래전략실까지 이어온 관리의 힘, 비(非)오너 체제 재정립 필요

윤필호 기자공개 2020-06-22 08:05:03

[편집자주]

세계 최대 농업·식품회사인 카길은 비상장이고 가족지배 기업이지만 현재 가족이 경영하지 않는다. 세계적 플랫폼 기업 구글도 창업자들이 1선에서 모두 퇴진, 인도 출신 순다르 피차이가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소유·경영의 분리 사례다. 자본시장의 역사가 짧은 한국 기업은 태생적으로 소유·경영의 융합모델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고도 성장과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너경영 3·4세 시대에 접어들며 변화를 요구받는다. 국내 대표 기업 삼성이 그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다. 지배구조 뿐 아니라 이사회·내부통제·조직구성에 까지 영향을 줄 사안이다. '포스트 이재용 선언'은 곧 '포스트 재벌시스템'이다. 이재용 선언 이후의 재벌시스템, 나아가 4차산업혁명 이후의 재벌시스템을 조명해본다.

이 기사는 2020년 06월 16일 07:10 더벨 유료페이지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4세대 경영 포기 선언을 했다. 더 이상 경영 승계를 하지 않고 새로운 거버넌스를 구축하겠다는 선언이다.

삼성은 한국 재벌 시스템을 상징하는 기업이다. 오너의 강력한 리더십을 기초로 과감한 의사 결정과 투자 덕에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삼성의 오너십 포기 선언은 한국 재벌 시스템에 일대 변화를 예고하는 일이다.

재벌 시스템의 변화는 오너 경영과 전문 경영이란 화두로 이어진다. 오너 경영과 전문 경영 중 무엇이 더 효율적인가란 질문에 정답은 없다. 다만 오늘날 삼성을 만든 힘의 원천이 오너 경영이란 데엔 이론의 여지가 없다.

김화진 서울대 교수는 "가족 경영만큼 책임감을 갖고 회사를 키우려는 강한 인센티브가 있는 시스템은 없다"고 설명했다. 삼성의 지금까지 성장은 이같은 인센티브가 가장 잘 발휘된 결과물이다.

포스트재벌시스템에선 오너 경영을 대신한 새로운 시스템이 효율적으로 작동할 것인가의 질문으로 귀결된다.

◇관리의 삼성 만든 오너 경영의 힘

삼성의 힘은 '관리'에서 나온다. 그 시작은 창업주인 고 이병철 명예회장으로부터 내려온 강력한 오너십에서 비롯됐다. 특유의 카리스마를 내세운 이 명예회장의 결단을 기반으로 삼성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분야로 외연을 확장할 수 있었다.

강한 오너십에 기반한 성공 방정식은 지금의 지배구조를 구축하도록 유인했다. 삼성이 규모를 확장할수록 그리고 성공을 거듭할수록 오너의 결정권이 갖는 무게감이 커졌고 대를 이어가며 점차 정제시킨 의사결정 구조는 하나의 유산으로 공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창업주인 고 이병철 명예회장은 철두철미하면서 과감함을 갖춘 사업가로 알려졌다. 그는 신사업을 추진할 때마다 다양한 사회적 수요에 부합하는지를 꼼꼼하게 따졌고 확신이 생기면 강력하게 드라이브를 걸었다.

기본 물품이 부족했던 1950년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으로 시작해 사세를 키웠다. 그러다 1966년 한국비료 밀수사건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며 위기를 맞이했다. 잠시 주춤했던 이 명예회장은 1969년 경영에 복귀하며 전자 산업에 진출했고 당시 승부수는 현재 삼성전자의 시금석이다.

이 명예회장의 다양한 업적 가운데 반도체 산업 진출 결정은 강한 오너십을 상징하는 대표적 사례다. 그는 1983년 '도쿄선언'을 통해 반도체 D램 제조사업에 진출 의사를 밝혔다.

주변에서는 회의적인 시선이 더욱 많았다. 이미 미국과 일본 기업들이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떻게 경쟁력 있는 제품을 만들 수 있겠냐는 비판이 나왔다. 게다가 아무런 기반 없이 새로운 산업에 진출하기 위해서는 기술력과 대규모 투자가 필요했다. 반도체 제품은 주기가 짧아 위험부담도 높았다.

삼성이 각종 우려와 반대를 물리치고 반도체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병철 선대회장의 강력한 의지가 깔려 있다. 결과적으로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은 글로벌 1위로 도약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대범한 결단력이 결과를 만들자 오너를 향한 신뢰는 더욱 강해졌다.

삼성이 강력한 오너십을 바탕으로 성장하면서 동시에 지배구조는 신속하게 결정을 내리고 실무진에게 하달할 수 있는 형태로 발전했다. 그 과정에서 중요한 오너의 적절한 판단을 보좌하고 늘어나는 계열사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컨트롤타워 역할을 맡았던 조직이 바로 1959년 만들어진 비서실이다.

비서실은 삼성물산 내부 20여명 규모의 조직으로 출발했지만 1970년대 삼성이 급격하게 팽창하면서 기능을 강화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규모는 15개팀, 250여명까지 확대됐다. 이렇게 완성된 오너-컨트롤타워 체제는 삼성이 덩치를 키우면서도 흔들리지 않고 조직을 정비하며 성장할 수 있도록 중추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건희의 개혁도 '관리경영'에서

삼성의 힘은 비서실로 시작해 미래전략실로 이어지며 중추적인 역할을 맡았던 컨트롤타워에 있었다. 비서실은 오너의 핵심 사안에 대한 결정을 보좌하도록 기능했고 흔들림 없는 지배체제를 구축했다.

2세대 오너인 이건희 회장은 선대가 구축한 강력한 지배체제를 시대에 맞게 고쳐 삼성의 본격적인 규모 확대 과정에서 걸맞는 체제를 완성했다. 이 회장은 이 명예회장 작고하고 1988년 회장으로 취임한 이후 10여년간 기존 비서실을 활용했다.

비서실은 삼성이 위기를 맞이할 때마다 변화를 모색하며 오너의 곁을 지켰다. 그러다 1998년 외환위기 사태 이후 상시 경영 체제를 선언하면서 비서실을 해체하고 구조조정본부를 도입했다.

이후 2005년 삼성 X파일 사건이 터진 이듬해 전략 기획실로 재조정을 거쳤다. 2008년 삼성특검 사태로 해체한 이후 2년이 지난 2010년 미래전략실이 들어섰다. 미래전략실은 2016년 해체하기 전까지 미래먹거리 투자와 사업 전략 확립, 인사 등 핵심 업무를 책임졌다.

이 회장은 선대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식으로 강력한 오너십을 유지했다. 특히 빠르게 변화하는 경영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개혁을 주도했다. 낡은 관행은 버리되 오너가 가진 결정 권한과 영향력은 이어가는 방식이다. 1993년 '마누라와 자식을 빼고 모두 바꾸라'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이 같은 변혁을 상징한다.

이 회장은 이를 단순 선언으로 그치도록 하지 않기 위해 임직원을 대상으로 지속적인 강연과 토론을 진행했다. 그가 주도한 신경영은 기존의 이 명예회장이 쌓아올린 오너십을 더욱 두텁게 다졌고 삼성도 국내를 벗어나 글로벌 기업의 반열로 올라섰다. 수십개 계열사와 조직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는 지배체제 역시 완성도를 높였다.

2세대까지 삼성은 오너 중심의 중앙 집권식 의사결정 구조로 성장을 거듭했다. 오늘날 삼성의 레거시는 이같은 오너십 덕이다. 김화진 서울대 교수는 "가족 경영을 다 부정적으로 볼 것은 없다"며 "유산으로 물려받은 회사를 당대에 쇠락시키지 않겠다는 절박함이 오너 경영인에겐 강력한 인센티브가 된다"고 강조했다.

◇시작된 포스트 오너 체제

관리의 삼성은 최근 시대 변화에 따라 비판의 대상이 됐다. 효율성만 추구한 삼성의 중앙집권식 의사결정은 독선의 이미지로 덧씌워졌고 삼성은 의사결정 과정을 분산하는 실험을 진행중이다.

미래전략실은 해체됐고 이사회와 개별 회사 중심, 전문 경영인 중심의 의사결정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 부회장은 본인을 끝으로 오너경영 체제를 마무리짓겠다는 선언을 했다.

오너 체제를 단번에 전문 경영인 체제로 전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게다가 80년간 구축된 수직적 의사결정 시스템을 바꾸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삼성의 의사결정 시스템, 거버넌스엔 재정립이 필요하다. 삼성의 변화는 막을 수 없는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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