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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은행 '횡령 시퀀스' thebell note

김현정 기자공개 2022-05-06 07:52:05

이 기사는 2022년 05월 04일 07:58 더벨 유료페이지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 촉망받는 발레리나 데이지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나온다. 일련의 사건들이 하나로 모여 교통사고라는 최종 결과물로 이어지는 시퀀스가 인상적이었다.

한 여인이 상점에 주문해둔 물건을 바로 찾아가려 했지만 점원이 포장을 깜빡했다. 몇 분 뒤 물건을 받은 여인은 택시에 올랐고 갑자기 튀어나온 트럭 때문에 택시는 잠시 멈춰섰다. 그 시각 친구와 함께 공연장을 나선 데이지는 신발끈이 끊어진 친구를 기다렸다. 마침내 공연장 문을 빠져나온 데이지가 마주한 것은 그 택시와의 충돌사고였다.

만일 여인이 그 택시를 잡지 않았다면, 점원이 미리 포장을 해뒀다면, 트럭이 튀어나오지 않았다면, 친구 신발끈이 끊어지지 않았다면. 사고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은행에 대규모 횡령 사고가 발생했다. 세 차례에 걸쳐 614억원의 자금이 은행 밖으로 빠져나갔고 여러 상황들이 맞물려 횡령 사실은 10년 넘게 은폐됐다.

일반적인 대고객 거래가 아닌 M&A 비경상적 자금이 본사로 들어온 게 출발이었다. 돈이 머무른 경위도 이란 제재(sanction)라는 특수 케이스였다. 금융위와 국무조정실, 기재부, 외교부, 법무부, 산업통상자원부가 매달린 사안이었던 만큼 풀스토리를 챙겨온 A차장이 계속 이를 일임했다.

A차장의 치밀한 서류 위조도 통제를 무력화시켰다. 부동산신탁사에 돈을 맡겨둔다며, 캠코가 돈을 관리하기로 했다며 허위 서류를 작성해 결재를 받았다. 캠코와 유사한 이름의 SPC 회사로 돈이 흘러갔는데 이는 A차장 친동생이 만든 회사였다.

여기에 A차장의 훌륭한 내부 평판이 방점을 찍었다. 평소 매우 성실하고 일을 잘하는 직원으로 정평이 나있었다. 외모마저 준수했던 그를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한다.

일각에선 우리은행은 치밀한 사기극의 피해자로, 사실상 작정하고 저지른 일탈은 막을 방도가 없다는 동정론도 나온다. 다만 ‘우리은행이 할 수 있는 게 과연 없었을까’를 짚어보면 아쉬움은 남는다.

보호예수로 넣어놨기 때문에 확인을 안 해도 된다는 A차장의 말을 뒤로하고 기업개선부 장부를 대사했다면, '명령휴가' 때 A차장의 업무를 제대로 감사했다면 이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아무리 특수업무라 하지만 업무 로테이션도 필요한 일이었다. 전문성이 있어 그가 계속 이 업무를 맡게 된 게 아니라, 우리은행의 안일함이 그의 전문성을 만들어줬다. 이렇듯 여러 상황이 A차장의 비뚤어진 욕심에 힘을 보탰다.

견물생심(見物生心). 좋은 물건을 보면 탐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라고 한다. 매일 매일 거액의 돈을 마주하는 은행에 횡령 사고가 끊이지 않은 이유인 것 같다. 인간의 본성을 막을 수 있는 건 역시 시스템일 수밖에 없다. 유비무환이라는 말처럼 촘촘한 대비만이 사고를 막는 길이다. 그것이 회색지대에 놓인 눈먼 돈일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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