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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토목과 3인방의 31년 동행 김영윤 도화종합기술공사 회장

박준식 기자/ 이재영 기자공개 2010-08-18 09:20:21

이 기사는 2010년 08월 18일 09:2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곽영필과 유재소, 김영윤은 1976년까지 건설부에서 함께 근무했다. 세 사람 모두 서울대 토목과 출신으로 6년 차 선후배 사이다. 공직에선 각각 서기관과 사무관, 토목 설계 기사까지 일했다.

1977년, 막내였던 김영윤이 민간으로 먼저 나왔다. 1975년에 결혼한 그는 아내에게 공무원 박봉을 강요하는게 싫어 출세길을 일찌감치 접었다. 12만 원 하던 월급은 60만 원으로 다섯 배 올랐지만 대신 개인적인 시간은 사라졌다.

당시 중동 붐을 타고 해외 입찰이 넘쳐났다. 한 달에 보름은 여관에서 합숙을 했다. 설계 견적을 내고 일주일 동안 출장을 떠나 현지에서 수정 작업을 거치기가 다반사였다. 집에서 출퇴근하는 건 한 달에 일주일이 채 안됐다. 1년 반 동안 그렇게 열 건이 넘는 딜을 땄다.

민간 생리에 어느 정도 적응할 무렵인 1978년 말, 곽영필과 유재소가 공직을 그만두고 '영엔지니어링'이란 토목 설계회사를 차렸다. 김영윤에겐 두 선배의 부름이 거부할 수 없는 운명 같았다. 세 사람은 민간에서 다시 뭉쳤다.

건설부 3인방이 사업을 시작했지만 시장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설계사는 시공사나 감리사에는 철저한 을(乙)에 불과했다.

그나마 건설부 시절 미국 감리사인 CDM과 인연을 쌓은 게 업무를 수월하게 했다. CDM이 3인방의 실력과 노하우를 알고 차관 분야 사업의 감리 승인을 까다롭게 보지 않았다. 세 사람의 협업에는 자신감이 붙기 시작했다.

설계 일감을 쌓을 때쯤 뜻밖의 제의가 왔다. 건설부 대선배이자 민간에서 성공한 사업가였던 김해림 도화종합설계공사 회장이 기업을 경영해보겠냐고 물어온 것이다. 김해림은 당시 토목계 원로로 한국전쟁 전까지 내무부에서 일했던 인물이다.

분단 전후엔 국내 토목 공사를 대부분 정부가 설계·시공했다. 당시 김해림은 미국 원조 등으로 해외 경험을 하고 설계 인력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전쟁 후 훌륭한 토목 기술자를 양성하는 게 보국(報國)이란 일념으로 기업을 시작했다.

창업주 철학을 바탕으로 도화는 인재 사관학교로 성장했다. 70년대 고 정주영 현대건설 사장은 도화 출신 인력이라면 무조건 영입하려 했을 정도다. 박동서, 정상구 전 현대건설 부사장과 정영식 전 포스코 사장 등이 도화 출신이다.

그런 회사를 김해림이 내주려 한 까닭은 당시 지병으로 인해 더는 경영을 지속하기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자신의 경영 철학을 지켜줄 마땅한 후배들을 찾지 못하던 차에 건설부 출신 3인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김해림과 인연이 있던 곽영필이 나머지 두 후배의 의견을 물어 선배의 큰 뜻을 잇기로 했다. 핵심 인력이 다소 빠졌지만 그래도 100여 명의 설계 인력이 남아있던 회사였다. 김해림은 경영철학을 지켜줄 것을 전제로 경제적 조건 없이 기업을 넘겼다. 이를 물려받은 3인은 4년 후 대선배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극진히 예우했다.

도화(都和)란 사명은 고을 '도'에 화할 '화'를 쓴다. '더불어 살며 나눔을 같이 한다'는 의미다. 먼저 사장이 된 곽영필은 선배의 사업 철학을 올바로 이어받았다. 가족 같은 회사를 꾸미고 인재들에게 최고 대우를 약속하며 경기가 어려울 때나 좋을 때나 사람을 뽑아 가르쳤다. 임원이 되면 주식을 나눠줬다.

곽영필이 회사의 전통을 계승했다면 1995년부터 회장을 맡은 유재소는 도화의 기술력을 높인 주역이다. 차관 사업 등을 통해 일본과 독일의 기술력과 노하우를 흡수했다. 아시아개발은행(ADB)을 통해 차관을 들여와 독일 GKW의 기술로 안산하수처리장을 설계한 게 대표적이다.

당시 실무를 지휘한 김영윤은 기술을 내놓지 않으려는 외국 설계인력과 씨름하며 현장 경영을 도맡았다. 하수처리장 토목 설계의 포인트는 원하는 방류 수질에 따라 처리시스템 처리기술을 달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김영윤은 기술을 배우려고 설계를 역추적했고 이전을 강하게 거부하는 독일 인력들에겐 관의 힘을 빌려 엄포를 놓기도 했다. 필사적으로 노하우를 쌓았고 일단 감을 잡은 후 세계은행 차관 등을 더 들여와 제2, 제3 프로젝트를 성공시켰다. 한국이 고도처리와 질소·인 처리를 통해 깨끗한 수도물을 가지게 된 배경이 여기에 있다.

2005년 회장 자리를 물려받은 김영윤은 창업 3인방의 막내이지만 도화에서 상무로 시작해 전무와 부사장 등을 역임하면서 실무를 책임져온 주역이다. 현장에서는 기술자로, 사내에는 기획 임원으로 일하며 회사 인원이 300명일 때까지는 직원 개개인의 신상까지 파악한 꼼꼼함을 지녔다.

김영윤의 공은 무엇보다 창업동지인 두 선배 사이에서 이견을 조율하며 31년의 공동경영을 다툼 없이 이끌었다는 점이다. 사람이니 욕심이 나기 마련인데 경영승계가 무리 없이 이뤄진 걸보면 세 사람 서로가 무던히도 절제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반세기 동안 도화는 세(勢)를 키우는 것에는 집착하지 않았다. 자산과 규모가 아니라 인재 양성에 집중했다. 김영윤이 회장을 맡고 나서 세 명의 전·현직 회장은 기업공개(IPO)를 준비하기로 했다. 세 사람의 초심에는 변함이 없지만 주식을 나눠준 40여 명의 임원들에게는 보상이 필요했다.

김영윤은 기업공개 과정에서 31년 동안 쌓은 업력을 객관적으로 돌아볼 수 있었다. 처음에 그는 "상장하지 않고도 경영할 수 있는데 왜 고생을 해야 하나"란 자책도 했다. 그러나 도화가 국내에 머물러서는 도태될 수밖에 없다는 확신을 얻고 나서 10년 계획을 다시 세웠다.

도화의 4대 회장 김영윤은 국제화를 염두에 두고 있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동. 남아메리카에 임원들을 보내 시장을 조사했고 토목 인프라 시장의 성장 가능성을 확인했다. 김영윤은 베트남과 카자흐스탄 지사를 통해 현지 회사를 인수할 계획도 세웠다.

토목 설계 국내 1위의 세계화는 다소 늦은 감이 있다. 하지만 도화의 시장은 선진국이 아닌 개발도상국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한국의 비약적 성장 비결이다. 이제 막 사회간접자본(SOC) 건설을 시작한 이머징 마켓에서는 승부를 걸어볼만 하다.

김영윤은 회사의 새로운 꿈을 실현시키고 후배를 찾을 생각이다. 도화의 회장들은 경영을 세습하지 않았다. 욕심을 버리고 이상적 기업 공동체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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