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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 아산 정주영 레거시] 아산의 방북과 현대아산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0-01-24 10:00:00

이 기사는 2020년 01월 24일 10: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강릉 씨마크호텔 로비 한쪽에는 청년 아산이 금강산에서 찍은 사진이 크게 걸려있다. 이 사진은 아산정책연구원을 포함해서 범 현대와 관련 기관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유명한 사진이다. 금강산은 아산이 어렸을 때 ”일하기 싫을 때 툭하면 가곤 했기 때문에 오솔길까지 대충은 다 알고 있는 곳“이다(이 땅에 태어나서, 337).

아산은 1989년 1월에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허담 위원장 초청으로 북한을 방문했다. 금강산 개발 협의를 위해서였다. 그 바로 전에는 소련에 가서 고르바초프 대통령을 만나 한소 경제교류와 시베리아 개발을 논의했었다. 첫 방북이라 긴장되고 걱정도 많았는데 동경을 거쳐 평양에 도착하니 공항에 40명이나 되는 친척들이 와있어서 놀랐다고 한다. 아산은 북에 열흘 정도 머물면서 금강산 공동개발 의정서를 만들고 왔다.

1998년에는 또 아산이 통일소라고 불리는 소떼와 함께 방북했다. 해상이나 공중이 아닌 판문점의 육상 군사분계선을 바로 넘어서 갔다. 아산은 금강산 관광을 북측과 협의할 때부터 ”군사분계선의 통과를 우리 민족이 합일로 나아가는 출발의 상징으로 생각했다“(343). 실향민 아산이 남북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민간차원에서 남북관계 개선에 천착했던 것은 당연한 일로 보이지만 그러나 이는 단순히 아산이 고향을 그리워하는 실향민이어서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1998년 6월에 83세의 아산은 서산의 농장에서 잘 키운 한우 3천 마리 중 500마리를 트럭에 싣고 방북했다. 농장에서는 큰 환송 행사가 열렸다. 아산은 판문점에서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었다. CNN은 전 세계에 그 장면을 송출했고 문명비평가 기 소르망은 아산의 소떼 방북을 ’20세기 최후의 전위예술‘이라고 불렀다. 아산은 기자회견에서 “이번 방북이 개인의 고향 방문이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 화해와 평화를 이루는 초석이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그런데 이 소들이 병이 나서 폐사하기 시작했다. 북한 당국은 이를 언짢아 했다. 북한은 조사 결과 소들에게 작은 비닐 같은 이물질들을 먹여 보냈다고 우리 정부를 비방하기도 했다. 소들에게서 이물질이 검출된 것은 사실이었지만 먹이를 잘 먹고 건강상태가 좋았을 때는 전혀 문제되지 않을 정도의 소량이었다. 소는 축사 밖에 나가면 먹이에 이물질을 같이 먹기도 한다. 요는 북한에 가서 먹이를 잘 먹지 못한 소들이 허약해졌던 것이 이유였다.

그래도 아산은 1998년 10월에 다시 501마리를 이번에는 철저히 검진한 후에 보냈다. 그래서 총 1001마리가 북으로 갔다. 이 소들은 아산이 고향에서 가출할 때 집에서 소를 판 돈 70원을 가지고 나왔던 데 대한 갚음이었다. 원금이 1000마리, 이자가 한 마리다. 물론 상징적이다. 아산이 서울에서 자리 잡고 고향에 큰돈을 가지고 이미 돌아갔었기 때문이다. 트럭과 사료도 같이 갔다. 총비용이 41억7700만 원이었다.

아산은 2차 소떼 방북 때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김정일 위원장은 평양의 백화원초대소에 깜짝 방문을 했는데 ”명예회장 선생께서 연로하시고 거동이 불편하셔서 직접 왔다“고 했다 한다. 그때 같이 찍은 사진들이 있다. 아산, 김정일, 정몽헌 세 사람이 아산을 가운데 두고 찍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정일 위원장이 나이 든 사람을 잘 예우한다는 말이 나왔었다. 그 2차 방북 직후 첫 금강산 관광 크루즈선 ’금강호‘가 출항했다.

1999년 2월 현대그룹은 금강산 관광 등 대북사업을 전담할 회사를 아산(주)이라는 이름으로 설립했다. 나중에 현대아산으로 개명했고 현대엘리베이터의 자회사다. 금강산 관광은 2003년 개성공단 건설로 이어졌다. 그러나 어렵게 시작되었던 금강산 관광은 2008년에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이 나고 중단되었다. 개성공단도 2013년 폐쇄 후 재가동을 거쳐 2016년 2월에 북한의 핵 개발을 이유로 종국적으로 가동 중단되었다.

2001년 3월 아산이 타계했을 때 김정일 위원장은 조의문을 냈는데 ‘정주영 선생의 유가족들에게’라고 시작하는 조의문에서 “나는 북남 사이의 화해와 협력, 민족대단결과 통일애국 사업에 기여한 정주영 선생의 사망에 즈음하여 현대그룹과 고인의 유가족들에게 심심한 애도의 뜻을 표합니다”라고 밝혔다. 북한은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을 포함한 조문단도 파견했다.

TV조선에서는 한 프로그램에서 아산 탄생 100주년을 맞이해 ‘정주영이 없었다면 없었을 것’을 꼽아 본 적이 있다. 5위가 경부고속도로, 4위 조선 세계 1위, 3위 88올림픽, 2위 자동차 강국, 그리고 1위가 남북 민간 교류의 순으로 나타났다.

아산은 1989년 첫 방북 때 약 40년 만에 고향 아산을 방문했었다. 고향집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감나무 다섯 그루는 기억했다고 한다. 남쪽으로 떠나는 날 작은 어머니에게 와이셔츠 한 벌을 내주면서 다음에 와서 입도록 깨끗하게 빨아놓으라 당부하고 왔다. 그래서 아산의 소떼 방북 이전에 출간되었던 아산의 회고록에는 ”고향의 작은 어머니 방에는 내가 벗어놓고 온 와이셔츠가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343)라고 적혀 있다. 아산은 소떼 방북 때 9년 만에 다시 마지막으로 고향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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