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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재벌시스템]일본 '자이바쯔'에서 미국식 '보드' 모델로④삼성, 고도 성장기엔 일본식 롤모델…이사회 강화 움직임은 미국 인텔 등과 유사

윤필호 기자공개 2020-06-25 07:05:38

[편집자주]

세계 최대 농업·식품회사인 카길은 비상장이고 가족지배 기업이지만 현재 가족이 경영하지 않는다. 세계적 플랫폼 기업 구글도 창업자들이 1선에서 모두 퇴진, 인도 출신 순다르 피차이가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소유·경영의 분리 사례다. 자본시장의 역사가 짧은 한국 기업은 태생적으로 소유·경영의 융합모델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고도 성장과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너경영 3·4세 시대에 접어들며 변화를 요구받는다. 국내 대표 기업 삼성이 그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다. 지배구조 뿐 아니라 이사회·내부통제·조직구성에 까지 영향을 줄 사안이다. '포스트 이재용 선언'은 곧 '포스트 재벌시스템'이다. 이재용 선언 이후의 재벌시스템, 나아가 4차산업혁명 이후의 재벌시스템을 조명해본다.

이 기사는 2020년 06월 19일 13:1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삼성의 롤모델은 어디였을까. 삼성을 비롯해 한국 경제의 성장을 이해할 때 일본식 모델을 빼놓을 수 없다. 삼성을 비롯한 한국 대기업들은 과거 일본식 선단형 대기업 모델을 따라왔다.

일본의 대기업집단은 자이바쯔 또는 게이레츠라 불리며 2차 세계 대전 이후 정부와 은행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다양한 산업에 진출한 형태를 띤다. 자이바쯔는 특정 경영자(오너)에 소유가 집중되고 게이레츠는 사장회를 중심으로 하되 상호 출자 형태의 촘촘하고 복잡한 지배구조를 보인다.

한국의 재벌은 오너 중심의 일본식 자이바쯔 모델이 원조라 볼 수 있다. 이 속에서 새로운 사업에 진출하면서 부족해진 지배력을 상호출자모델로 보완하는 변형된 형태였다. 고도성장기 은행과 정부 지원 속에 급속도로 성장했다는 점도 비슷하다.

2000년 대 들어 재벌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이같은 모델은 더 이상 힘을 얻기 힘들어졌다. 상호 출자에 대한 규제는 강력해졌고 오너 중심 경영에 대한 사회적 반감도 높아졌다.

삼성의 최근 변화는 이같은 사회 분위기를 대변한다. 삼성은 이미 이사회를 강화하며 오너의 역할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거버넌스를 변화시켰다. 전문 경영인의 역할이 중요해지고 급기야 오너 경영 세습을 포기하겠다는 선언까지 왔다.

이를 두고 영미 자본주의식 대기업 모델로 전환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전세계적으로 영향력을 미치는 미국 기업들의 지배체제는 하나의 강력한 척도가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30년대부터 지주회사법을 통한 과도한 지배력 억제의 움직임이 나타났고 2001년 엔론 사태로 지배구조 투명성 요구가 더욱 강해지면서 이사회와 회계, 감사가 지배구조의 중심축으로 들어섰다. 회사의 경영을 책임질 CEO를 뽑는 일도 이사회에 규정을 둬 시스템으로 움직이도록 하고 있다.

이재용 부회장은 다음 세대엔 경영 승계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했다. 일본식 자이바쯔 모델에서 미국식 '보드(board of directors, 이사회)'모델로 변화를 선언한 셈이다.

◇美 '엔론사태' 거쳐 이사회 영향력 강화

삼성을 비롯한 국내 기업들은 영미권 자본주의가 구축한 글로벌 경영 환경 속에서 경쟁을 한다. 때문에 미국 기업들의 지배구조 변화는 한국 기업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전세계 영향력을 행사하는 미국 기업들은 2000년대 들어서 발생한 엔론의 회계부정 사건 이후로 대대적인 지배구조 개선에 들어갔다. 2001년 엔론은 분식 회계를 통해 회사의 재무 상태를 허위로 보고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다.

미국은 엔론 사태를 교훈삼아 사베인즈-옥슬리법(Sarbanes-Oxley Act)을 제정했다. 법안은 투명회계와 기업윤리를 강조하면서 기업 지배구조 개선과 회계감사 기준을 강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이후 미국 기업의 지배구조는 상당한 변화를 진행했다.

상장규정은 홈페이지와 사업보고서에 지배구조 관련 정보를 공시하도록 요구했다. 미국 기업들이 경영 투명성 제고를 위해 점차 CEO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며 이사회 독립성을 강화하는 움직임을 보인 것도 이 때부터다.

삼성전자의 라이벌 기업으로 알려진 인텔은 이 분야에서 선두주자였다. 이미 1998년 CEO와 이사회 의장직을 분리하며 주목을 받았다. 2000년 마이크로소프트(MS), 2004년 오라클 역시 분리 추세에 동참했다. 국내 기업들도 최근 몇 년간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를 통해 독립성을 강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삼성전자의 경우 2018년 3월 분리를 선언했고 SK그룹도 지난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했다.

미국은 꾸준히 지배구조 개선의 움직임을 이어갔다. 2015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기업 지배구조원칙(Commonsense Corporate Governance Principles)을 채택했고 이듬해 미국 대기업들과 기관투자자들이 모여 이 같은 원칙을 발표했다.

이 원칙은 이사회의 실질적 독립성과 공통의 회계원칙을 통한 기업투명성, 기업과 주주간의 건설적 관계 형성 등을 담고 있다. 이후로 기관투자자들의 적극적인 주주행동주의 움직임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그해 말에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산하 스튜어드십 코드 제정위원회도 한국형 스튜어드십 코드를 만들어 공표했다.


◇오너의 책무 '후임 CEO 선임'

미국기업 CEO들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후임 CEO 육성이다. GE는 수십년간 CEO후보를 육성해 최종 경합까지 벌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GE CEO 후보에서 탈락한 이들은 경쟁사 CEO로 넘어가 탁월한 경영능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4세 경영 승계 포기 선언이후 이 부회장에게 주어진 책무도 후임 CEO를 선임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영구적인 CEO 육성 시스템을 만들어놓는 것이 숙제다.

삼성이 소유와 지배를 분리하기란 쉽지 않다. 이미 이재용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소유 구조가 공고하다. 이를 흔들 경우 외부의 경영권 흔들기에 노출될 우려가 크다. 이사회 중심의 의사결정구조를 강화하는 동시에 지배력도 안정적으로 확보하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한다.

삼성은 글로벌 기업들의 다양한 사례를 참고하고 있다. 오랜 기간 발렌베리 가문의 모델을 공부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다만 재단을 사실상 지주사로 삼아 지배구조를 구축하는 방식은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따른다. 이미 3년 동안 이사회 중심의 지배체제를 구축했던 경험도 이 같은 모델과는 거리가 있다.

삼성전자는 최근 박재완 사외이사를 이사회 의장에 앉히며 독립성을 강화시켰다. 이사회 중심 체제로 흐르는 모습은 반도체 라이벌인 인텔의 운영 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인텔은 1968년 로버트 노이스와 고든무어가 공동으로 설립해 1, 2대 CEO를 역임했지만 특정 오너가에서 경영권을 가져가지 않았다. 대신 3대 CEO로 인텔의 세 번째 직원인 앤디 그로브를 후임으로 앉혔다. 일찌감치 이사회의 독립성과 권한을 강화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맡겼다.

인텔 이사회와 CEO의 가장 중요한 책무로 후임 CEO를 선임하는 업무를 꼽을 수 있다. 특정 오너에게 경영권이 없기 때문에 실력과 인품을 갖춘 리더를 뽑아 조직을 이끌어갈 권한을 부여하는 일의 무게가 남다르다.

인텔은 글로벌 대규모 펀드회사들이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15일 기준 최대주주는 지분 8.24%를 보유한 뱅가드그룹(The Vanguard Group, Inc.)이다. 2대주주인 블랙록 펀드(BlackRock Fund Advisors) 5.04%, 3대주주 스테이트스트리트글로벌어드바이저(SSgA Funds Management, Inc.)는 4.55%를 보유하고 있다.

이사회 중심의 경영 구조로 경영성과를 내고 펀드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이사회가 운영되는 선순환 구조다.

인텔의 이사회는 사내이사와 12명의 독립적 이사로 구성됐으며 그 외에 의결권이 없는 명예이사 두 명이 참석한다. 매년 CEO로부터 CEO 승계 계획, 경영진 역량 강화, 기업지배구조 경영원칙 요구사항의 면제 등을 보고받고 논의한다.

인텔은 전통적으로 충분한 시간을 두고 CEO를 교체했다. 3대인 앤디 그로브 이후로 4대 크레이그 배럿, 5대 폴 오텔리니, 6대 브라이언 크르자니크, 7대 로버트 스완 등이 CEO직을 이어받았다. 해외 언론에서는 교체 업무를 담당하는 이사회를 '킹 메이커'로 묘사하기도 한다.

삼성은 이사회 중심의 지배체제를 위해 각종 규정과 제도를 도입하고 있다. 현재 삼성 각 계열사 이사회는 CEO 승계정책을 명시적으로 지정했다. 핵심 계열사 삼성전자의 경우 매년 임원을 대상으로 자격검증을 통해 대표이사 후보군을 선정하고 있다. 1~2년내 즉시 보임 가능한 'Ready Now 후보군'과 육성 후 3~5년 이후 보임 가능한 'Ready Later 후보군'으로 분리해 선발한다.

재계 관계자는 "이사회 중심의 지배체제는 이 부회장이 이사회와 함께 후임 CEO를 지정하면서 완성될 것으로 보인다"며 "삼성이 이 부회장을 끝으로 오너가 중심의 지배체제를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CEO 후계 시스템이 과제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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