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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대 아파트의 역설 [thebell desk]

김용관 산업1부장공개 2020-08-10 07:33:55

이 기사는 2020년 08월 07일 08: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당신이 사는 곳이 당신을 말해줍니다." 2000년대 초반 유행했던 한 건설사의 광고문구다. 이처럼 인간의 우월감과 탐욕을 적나라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한국토지주택공사가 사용한 아파트 브랜드인 휴먼시아가 지금의 LH로 바뀌기 전 '휴거'라는 말이 유행했다. 휴먼시아 아파트에 사는 거지라는 말이다. 지금은 '엘사'라고 한다. LH(엘에치) 사는 사람, 즉 임대 아파트에 사는 사람을 비하하는 단어다. 월거지, 전거지라는 말도 있다. 물론 월세사는 거지, 전세사는 거지를 뜻한다.

우리나라는 재개발이나 재건축시 일정 비율을 임대 아파트로 지어야 한다. 그런데 아파트 집값 방어와 품위 유지(?)를 위해 임대동과 일반동을 구분하기 위해 명확한 경계를 둔다. 놀이터를 사용하지 못하게 경계를 치거나 출입문을 달리하는건 기본이다. 임대 아파트 들어선다고 부모들이 단체로 자식을 전학시키는 사례도 종종 있다고 한다.

초등학생 중에서도 주거 형태나 소유 형태에 따라 이같은 단어를 쓰며 동기들을 차별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가만히 따지고 보면 은행 대출받아 매매하거나 분양받거나 원리금 갚아나가는 신세는 월세나 전세나 똑같기 매한가지인데 인간의 탐욕은 정말 끝이 없다.

그러나 이같은 부정적인 인식과 상관없이 임대 아파트 확대는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인 것 같다. 무한정 오르고 있는 집값을 감안할 때 2030세대가 집 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2030세대의 무력감, 한창 자녀가 커가는 40대의 좌절감. 이들의 문제를 현재로선 해결할 방법이 없다.

정부도 싱가포르 사례를 들며 공공주택 확대에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싱가포르는 가장 이상적인 주택 정책을 펼친 국가 중 하나다. 싱가포르의 자가 점유율은 약 90%로 우리나라의 58%(2019년)와 비교해 약 1.55배 정도 차이가 난다. 이중 공공주택 보급률은 70%가 넘는다.

싱가포르가 이렇게 주택 정책에 성공한 원인은 강력한 토지 수용으로 국토의 80% 이상을 국유화한 뒤 중산층 이하에 공공 아파트를 싼 가격에 분양했다는 점에 있다. 이들 공공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반드시 주택개발청(HDB)에만 되팔 수 있고 되팔 기회도 평생 딱 두 번으로 제한한다. 도시국가라는 국가적 특수성 때문에 가능한 정책이기도 하지만 생각할 여지가 많다.

문제는 임대 아파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다. 이원욱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제는 소셜믹스(social mix)를 동으로 분류할 게 아니고 완전히 아파트를 섞어야 한다고 본다”며 “같은 단지 내 같은 동, 같은 건물 내에서도 임대 아파트가 7층에 있고 6층에 있고 이런 식”이라고 했다.

하지만 현 정부는 탐욕에는 도덕이 없다는 점을 모르는 것 같다. 소셜믹스 정책은 2000년대 초반부터 도입됐지만 실상은 오히려 이를 더 차별화하려는 '안티 소셜믹스(anti social mix)' 노력이 치열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래서 재건축 사업장들은 정부 시책을 불신하고 있다. 일례로 은마아파트 소유자협의회 대표는 "소셜 믹스에 따른 공공 임대주택과의 단지 내 갈등은 정부에서 치유해 주지 않지 않는다. 고스란히 우리의 몫"이라며 부정적인 시각을 내비치고 있다. 민주당은 이번 국회 임기가 끝날 때까지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고 하지만 40년을 녹물먹고 살았는데 5년이야 못참겠냐는게 입주자들의 반응이다.

그런 점에서 싱가포르 사례는 고민해볼 만하다. 싱가포르 공공주택의 특징은 단순히 값이 싸다는 데만 있지는 않다. 주민들이 선호할 만한 다양한 장점을 갖추고 있다. 가령 지하철역과 연계해 교통이 편리한 곳 위주로, 그리고 교육 인프라가 풍부한 곳에 아파트를 만드는 등 직주근접성과 교육환경을 우선적으로 고려한다고 한다.

강남 재건축 단지가 이같은 요건을 상당부분 충족하지만 거주자들의 반대가 만만치 않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무조건 양보하라고 요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부 투기꾼도 있겠지만 상당수는 재건축을 바라보며 아파트 한채 가진 중산층들이다. 이미 적지 않은 세금을 국가에 내고 있다.

그래서 정부의 8·4 대책에서 신규택지 개발을 통해 공급하기로 한 3만3000가구를 모두 임대 주택으로 분양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변화를 시작했으면 한다. 이들 지역은 대부분 직주근접성이나 교육환경이 우수한 곳이다.

태릉골프장 부지, 용산 삼각지역 인근 미군 부지, 정부과천청사 인근 부지, 서초구 서울조달청 부지, 서초구 국립외교원 유휴부지, 상암DMC 미매각 부지, SH 마곡 미매각 부지, LH 여의도 부지, 서부면허시험장 등 대부분 목 좋은 곳들이다.

부자들에게 거둬들이는 취득세, 보유세, 양도세 등 막대한 세금을 정부 소유도 아닌 민간 재건축 단지에 쏟아부어서는 안된다. 그 돈으로 임대 아파트를 아주 럭셔리하게 지어서 싼값에 분양해야 한다.

단지내에 수영장도 만들고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커뮤니티 센터도 지어야 한다. 특목고나 자사고를 다시 도입해 주변에 좋은 학군도 조성해야 한다. 8년 임대가 아니라 싱가포르처럼 영구 임대 형식으로 분양해야 한다.

관리가 잘 안돼 슬럼화되는 사례를 막기 위해 임대 아파트만 관리하는 회사도 만들어야 한다. 아파트 건물도 관리하고, 정원도 관리하고, 경비도 하고, 청소도 하는 그런 관리회사 말이다. 제대로된 일자리 창출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현실적이지 않다고? 지금 정부 정책도 현실적이지 않긴 마찬가지다. 인간은 탐욕적이다. 그들의 욕망을 채워줄수 있는 정책을 펴야 한다. 목 좋고, 교육 환경 우수한 곳에 고급스런 아파트를 지어 장기로 임대하는게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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