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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코대우, 인고의 시간 20년 그 이후 [종합상사 생존전략]①법정관리 졸업 후 재건한 '대우맨·상사맨' 자존심

박기수 기자공개 2018-11-20 08:30:07

[편집자주]

종합상사는 '라면부터 미사일까지' 라는 말로 표현되듯 무엇이건 돈이 되는 사업을 발굴해 수익을 창출하는 기업으로 의미가 확대됐다. 국내 경제 발전의 중심에 서있었던 종합상사들은 시대의 변화로 사업 다각화를 통해 살 길을 모색하고 있다. 더벨이 국내 주요 종합상사의 발자취와 현주소, 향후 행보 등을 들여다 본다.

이 기사는 2018년 11월 15일 14:39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오늘날 종합상사(綜合商社)는 한마디로 정의하기 힘든 명사가 돼버렸다. 첫 탄생 당시 수출입 등 무역업 위주였던 종합상사는 시간이 흐르며 '무엇이건 돈이 되는 사업을 찾아 수익을 창출하는' 성격의 업체로 변해갔다. 종합상사를 넘어 국내 대표 종합사업회사로 거듭난 포스코대우도 이 길을 걸어왔다.

국내 종합무역상사의 탄생은 당시의 경제 정책과 궤를 함께한다. 종합무역상사 제도가 만들어진 1975년 당시 국내 경제의 최대 관심사는 '수출 증대'였다. 정부는 원자재와 시설재에 대한 세제 감면과 외자 도입 허용, 수출금융 등 막대한 지원금을 쏟아부으며 기업들의 참여를 유도했다. 현 포스코대우의 시초인 '대우실업' 역시 이때 종합상사로 지정됐다. 자본금 500만원, 직원 5명으로 메리야스 편물만을 생산하던 대우실업이 탄생 후 8년 만에 이뤄낸 일이다.

대우실업
△포스코대우의 시초인 대우실업 전경(좌), 김우중 대우그룹 전 회장(우)

◇㈜대우 시절 영광 뒤로…대우인터내셔널의 탄생

대우실업은 1982년 대우개발과 합병하며 ㈜대우로 거듭난다. 1983년 '세계경영'을 선포한 대우그룹의 중심이 바로 ㈜대우였다. 이미 1970년대 대우전자와 대우조선공업 등을 설립했던 대우그룹은 1980년대에 들어 중화학 공업뿐 아니라 전자·통신 시장에 진출하며 국내 굴지의 대기업으로 급성장했다. 다만 개발도상국을 대상으로 한 해외 투자금의 대부분이 현금 창출보다는 차입을 통한 점이었다는 점은 훗날 대우그룹 몰락의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인고의 시간은 IMF 사태 때부터 시작된다. 대우그룹은 경영 여건이 악화하는 순간에도 쌍용차 인수 등 확장 정책을 지속했다. 다만 외환위기로 금융권이 대출금을 서둘러 회수하기 시작하면서 상환 불능 상태에 빠지기 시작했다.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추진한 대우전자 매각이 실패하고, 힐튼호텔을 매각했지만 유동성 부족 상태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결국 1999년 8월 26일, 대우그룹은 채권단 관리하에 워크아웃에 돌입한다. 국내 재계 자산순위 2위였던 대우그룹이 '공중분해'되는 순간이었다. 2000년 12월, 대우인터내셔널은 ㈜대우 무역 부문의 인적분할로 탄생했다. 전신인 ㈜대우나 시초인 대우실업과 비교했을 때 썩 유쾌하지 못한 탄생 배경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이 탄생한 2000년 말 당시 수출 실적 49억달러로 국가 전체 수출의 2.8%를 담당했다. 종합상사 총매출액인 810억 달러 중에서는 6%를 차지해 종합상사 중 5위를 기록했다. 선박을 포함한 기계 운송 류의 수출 실적이 전체 수출의 54%를 차지했다. 현재 주력 중 하나인 철강 트레이딩은 당시 전체의 9.3%(6억 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종합상사로서 재기에 힘쓰고 있던 대우인터내셔널은 외부 환경마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교통·통신의 발달과 함께 제조업체의 직수출 등이 이뤄지며 종합상사가 설 곳이 줄었다. 한때 한국 수출 실적에서 50%를 상회하던 종합상사의 수출 비중은 2002년 34%, 2003년 27%, 2007년에는 5.7%까지 하락한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정상화 작업과 동시에 미래 생존을 위한 전략 수립에 나서야만 했다.

종합상사 비중

문제는 내부 상황이었다. 2000년 인적 분할 당시 한국자산관리공사가 지분 19.42%를 보유하던 대우인터내셔널의 2000년 말 연결 기준 부채비율은 무려 1567%였다. 사업확장 대신 부실 계열사 정리와 자산 매각에 집중할 수밖에 없었던 환경이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주력 무역 사업 내실화에 집중하며 변동성이 상대적으로 작은 삼국 간 무역 거래에 집중했다. 워크아웃을 졸업한 2003년 기준 전체 수출 24억달러 중 16억달러가 삼국 간 무역 거래에서 나왔다.

다만 그 와중에도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나섰다. 2000년과 워크아웃을 졸업한 이후인 2004년에 각각 미얀마 정부와 생산물분배계약을 체결하면서 미얀마 북서부 해상지역에서의 광구 개발권을 취득했다. 힘겨운 상황에서도 땅 아래 심층까지 뒤져 원유와 가스를 찾아내는 '층서 트랩'이라는 탐사 기법을 통해 가스전을 발굴했다. 이 사업이 현재 포스코대우의 주력 캐시카우로 거듭난 '미얀마 가스전' 사업 부문이다. 이 사업을 통해 미얀마 가스전 사업은 포스코대우 영업이익의 절반가량을 차지하는 알짜 사업으로 거듭났다.

미얀마 가스전
△포스코대우의 미얀마 가스전 사업

◇포스코 품으로…글로벌 종합사업회사로의 도약

번영과 몰락, 재건의 과정을 거치던 대우인터내셔널의 운명은 2010년 한 번 더 바뀐다. 당시 해외시장 개척을 외치던 포스코를 새 주인으로 맞았다. 당시 해외 진출에 목말라 있던 포스코는 2010년 8월 대우인터내셔널의 지분 68.15%를 3조3724억원에 인수했다.

포스코 편입 이후 철강 사업에서 안정적인 제품 공급처를 확보하는 것은 물론 미얀마 가스전을 중심으로 한 자원 개발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종합상사'의 틀을 벗어나 종합사업회사로 한 단계 발전하는 과정이었다.

굴곡도 있었다. 2015년 당시 포스코가 대우인터내셔널 자원개발부문의 분리매각 작업을 검토했다. 인수 당시 생각했던 시너지 효과가 생각만큼 나지 못했고, 무역중개업 특성상 부채비율이 높아 그룹 차원에서 재무 부담을 안겨주는 존재로 비쳤기 때문이다. 당시 전병일 포스코대우 사장은 사내게시판을 통해 '미얀마가스전 매각설에 대한 적극적 대응 시작'이라는 글을 게재하며 미얀마 가스전 지키기 작업에 몸소 나서기도 했다.

결국 미얀마 가스전을 지켜낸 대우인터내셔널은 이듬해인 2016년 사명을 현재 사명인 '포스코대우'로 바꾼다. 포스코그룹의 정체성과 대우의 브랜드파워를 모두 표현할 수 있는 사명이었다는 설명이다.

바뀐 로고
△대우인터내셔널 당시 CI(좌), 현재 포스코대우 CI(우)

우여곡절을 겪어온 포스코대우는 최근 인고의 결실을 보고 있다. 신사업인 미얀마 가스전이 확고한 캐시카우로 자리 잡았고, 트레이딩과 도금강판 판매 사업 등이 고르게 성장하며 올해 '역대급' 성적을 내고 있다. 이번 3분기 포스코대우의 연결 기준 매출과 영업이익은 각각 6조5318억원, 693억원으로 올해 누적 매출은 18조8786억원, 영업이익은 3554억원이다. 올해 발생한 미얀마 가스전 사고가 없었다면 영업이익 규모는 더 컸을 것이라는 게 업계의 평가다. 다만 현재 추세라도 지난해 전체 매출 22조5717억원, 영업이익 4013억원을 돌파할 것으로 보인다.

올 초 기준 포스코대우가 50% 이상 지분을 소유한 해외 자회사들은 총 34곳이다. 전 세계 21개국에 무역 법인 15개와 투자 법인 19개를 보유 중이다. 가스전 사업 외 포스코대우는 세계 각지에서 팜유 생산·발전 사업·면방 사업 등을 영위하고 있다. 법정관리 이후 인고의 20년을 거친 포스코대우는 명실상부 글로벌 종합사업회사로 확고한 지위를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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