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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 아산 정주영 레거시]현대의 ‘성지’ 서산 방문기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19-11-07 10:33:17

이 기사는 2019년 11월 07일 10:3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충청남도 서산에 서산 방조제가 있다. 네이버 지도를 켜고 보면 서산시 남쪽으로 안면도 초입과 거의 같은 위도에 서산A지구 방조제라고 명명된 6.5킬로미터짜리 긴 둑이 나온다. 이 방조제가 바다를 막아 약 2000만 평의 농지와 간월호가 생겼다. 서산B지구방조제는 A보다 짧다. 약 1200만 평 농지와 부남호가 탄생했다.

필자에게 현대그룹 고 아산 정주영 명예회장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일이 1984년 3월에 있었던 서산A지구 최종 물막이 공사다. 조류 유속이 초속 8미터로 너무 빨랐다. 여름 홍수 때 한강 유속이 초속 6미터다. 270미터 폭 마지막 물막이를 못하던 것을 23만 톤, 322미터 길이 유조선을 갖다 막고 가라앉혀 성공시켰다. TV 앞에서 그 생각의 스케일에 감탄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사진을 보면 정주영 명예회장이 둑 끝부분에 서서 워키토키로 작업을 지휘하고 있다. 잘못되면 조류에 휩쓸려 내려갈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작업을 몸소 현장지휘 했던 것이다. 이 대목이 바로 현대의 대표적인 레거시인 공격적이고 헌신적인 리더십을 상징한다.

A, B방조제 사이에 현대서산농장이 있다. 미곡처리장과 한우목장이 있는 곳이다. 1998년 6월 정주영 명예회장의 역사적인 소떼(통일소) 방북 때 주인공 소들이 이 농장 출신이었다. 2019년 8월에 준공된 현대에코에너지의 국내 최대 태양광발전시설 서산태양광발전소도 같이 있는데 그 위용이 대단하다. 그런데 오토바이용 밧데리 40만 개에 해당하는 전력생산 첨단 컨트롤 룸을 단 두 사람이 움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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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산농장 한쪽에는 아산기념관이 있다. 정주영 명예회장이 현지 체류 시에 쓰던 블록조 패널지붕 건물이다. 서울 청운동 고택과 실내 분위기가 비슷하다. 즉, 검소와 소박 그 자체다. 당시에는 어지간한 더위에도 고인이 냉방장치를 켜지 못하게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약 400여 점의 유품 보존 목적으로 에어컨과 항습기가 가동된다. 고인이 작업지휘 시 사용하던 1995년식 갤로퍼도 건물 밖에 깨끗하게 보존되어 있고 기념관 마당에는 직원들이 돈을 모아 세운 고인의 흉상이 서 있다.

농장을 떠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북쪽 바다에 면한 대산이 나오고 여기에 현대오일뱅크의 대산공장이 있다. 이웃에 KCC, LG화학, 롯데케미칼도 같이 있다. 정유공장과 화학공장이 함께 있는데 정유공장이라면 왠지 지나면서 옷에 기름이라도 묻을 것 같지만 제약회사보다 더 청결하고 질서정연하다.

특히, 작업장 내 안전을 강조하는 표지판이 곳곳에 설치되어 있다. ‘최고시설 자랑말고 최고안전 자랑하자'같은 것들이다. 보행 중 휴대폰 사용은 물론 금지되고 공장에서의 모든 회의는 ‘오늘도 안전합시다!'라는 구호를 다 같이 외치면서 끝난다고 한다. 회사 소개도 안전지침에서 시작되었다.

현대오일뱅크는 원래 현대정유였는데 2002년에 현대그룹에서 분리되면서 상호가 변경되었다. 현대정유의 모체는 1964년에 설립된 극동정유다. 1968년에 극동셸석유주식회사가 되었다가 1977년에 극동석유로 바뀐다. 1988년에 다시 극동정유가 되었다가 1993년에 현대정유가 되었다. 아랍에미리트의 하노칼과 IPIC가 70% 주주였는데 현재는 현대중공업지주가 약 91%를 보유한다.

30년 전인 1989년에 석유협회가 발간한 자료에 "현재 5개 정유사 중 4개사가 100% 민족자본에 의한 석유회사로 변모했다"고 자못 자랑스럽게 적혀있다. 세월이 흘러 이제 한국은 세계 1위의 정유산업국이다. 5개 회사 모두 글로벌 10위에 든다.

오일뱅크는 하루 69만 배럴 정제능력으로 글로벌 5위다. 일산 8만6000배럴 유동층 분해공정 덕분에 업계 최고 고도화율인 40.6%를 달성했다고 한다. 선박연료유의 황 함량을 현 3.5%에서 0.5%로 낮추는 해양환경규제 IMO2020으로 수요가 증가할 저유황유 공급능력도 갖춘 것이다.

오일뱅크에는 사우디의 아람코가 12월에 추가로 지분 17%를 취득하면서 대규모 투자를 하게 되어있고 SK네트웍스 직영주유소 324개를 인수하면 업계 2위가 된다. 회사가 정유-석유화학 부문 글로벌 플랫폼 회사로 변신을 시도하면서 차세대 에너지시장 선점 준비에 분주하다. 전기차와 수소차 시대는 복합에너지플랫폼 시대가 될 것이다.

현대오일뱅크에서 동쪽으로 향해 삼길포를 지나고 석문방조제를 건넌다. 방조제 동쪽 끝에 접어들면 국내 최초의 철강회사 현대제철 당진제철소의 거대한 돔들이 나타난다. 철광석과 펠렛을 저장하는 밀폐형 시설이다. 내부에 들어가 보면 마치 외계 우주선을 탄 것 같다.

현대자동차그룹에 속하는 현대제철은 국내 최초의 민간 일관제철소다. 2006년에 이름이 현대제철이 되었는데 현대차그룹에 들어 온 것은 2001년이었고 그해 이름을 INI스틸로 바꾸기 전까지는 인천제철이었다. 1978년에 현대그룹의 일원이 되었다. 2000년, 2004년에 삼미특수강과 한보철강을 각각 인수했다.

돔을 보고난 후에 현대중공업에 납품하는 선박용 후판제조 공장으로 이동해서 첨단 공정을 둘러 보았다. 여기서도 중후장대산업 현장에서 항상 그렇듯이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수백 미터에 달하는 전 자동화 공정에서 사람을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사람은 콘트롤 룸에만 있다고 한다.

이틀 동안 여러 곳을 둘러보면서 한결같았던 것은 일하는 사람들의 성실성과 소박함의 공통점이다. 어디나 국내 굴지의 대형 사업장들인데도 최고위 임원들부터 일반 직원들까지 겸손하고 헌신적이었다. 필자 일행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내하고 챙겨준 사람은 서산 생활 이제 40년을 바라본다는 오일뱅크 고참 부장이었는데 다음 주에 사위 본다고 기뻐하고 있었다. 현대제철 홍보팀장은 "어려운 시기에 다들 더 열심히 많이 일하자"고 다짐들 한다는 인상적인 말도 했다.

기업문화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이제는 계열까지 달라진 여러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서 공통점이 느껴지는 것은 놀랄 일이다. 그리고 창업주의 성품과 일하는 방식이 가족이 아닌 사람들에게도 전승되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이렇게 보면 창업자에 대한 기념사업은 단순한 우상화가 아니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듯이 우리 인간이 조직을 이루어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가상의 초점이 되어서 질서와 동력을 제공한다.

일행은 간월도의 낙조 감상과 그곳에 있는 한 횟집에서의 저녁으로 긴 하루를 마무리했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단골집이었던 횟집에 들어서면 고인이 항상 앉던 자리라는 광고판이 놓인 자리가 바로 보인다. 같은 광고판을 룸에도 갖다 놓아서 어디가 진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광고판에 고인의 사진이 들어있어서 마치 실제로 거기에 앉아 계시는 것 같은 느낌도 준다.

식당 사장님에게 명예회장께서 즐겨 드시던 음식이 뭐냐고 물었더니 막걸리라고 했다. 그래서 어제오늘 이틀, 나아가 많은 것들이 고인이 일군 사업과 레거시 덕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우리도 기분 좋게 같이들 한잔했다. 현대중공업과 현대자동차의 주력 사업장은 울산에 있지만 필자에게는 고인의 기념관이 있는 농장과 곳곳에 그 족적이 뚜렷하게 남아있는 서산 지역이 현대의 성지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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