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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흥의 딜레마 [thebell note]

고진영 기자공개 2021-12-31 09:29:04

이 기사는 2021년 12월 30일 07:55 더벨 유료페이지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어쩌다 ‘벌매’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봤다. 영어로는 허니 버자드(Honey Buzzard), 꿀 말똥가리라는 뜻이다. 벌집을 전문적으로 털어먹는 새라 이런 이름이 붙었다. 꿀벌이 모은 꿀이나 말벌의 통통한 애벌레가 타깃인데 사냥방식이 아주 독특했다.

벌매 여러 마리가 공성기처럼 벌집에 몸을 번갈아 부딪쳤더니 장수말벌이 우수수 떨어져나갔다. 곤충계의 전쟁광이라는 흉포한 성미도 별로 힘을 쓰지 못했다. 두텁고 빼곡한 벌매의 깃 때문에 독침마저 소용이 없다. 반격에 지친 벌들이 자리를 피하자 포식이 시작됐다. 적어도 벌매 세 마리는 합쳐야 맞먹을듯 했던 거대한 말벌집은 반토막도 안되는 크기로 쪼그라들었다.

와중에 벌집의 회복력이 가장 놀라웠다. 떠났던 일벌들은 얼마안가 돌아와 초토화된 둥지를 부지런히 고쳤다. 매들의 만찬이 이어졌지만 벌들 역시 끈질겼다. 쉽게 숨이 끊기지 않는 벌집은 단순한 무기체가 아닌 생명을 가진 무언가처럼 보였다.

대우건설이 중흥이라는 새 둥지로 옮긴다. 해체된 대우그룹의 울타리를 떠난 이후 여러 번 정착에 실패하면서 그간 해지고 흠집이 났다. 약육강식의 시장에서 업계 1위까지 넘봤던 입지도 적잖이 약해졌다. 중흥그룹으로선 탐스럽지만 치유하기 까다로운 매물을 품에 안은 셈이다.

사실상 주인없는 산업은행 체제 아래 특히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대우건설 일꾼들의 결속력이다. 수년째 임금이 동결된 탓에 퇴사 물결이 계속되고 있다. 재무제표가 나아진 반면 사기는 저하되고 불만도 치솟는 상태다. 설상가상 대우에 미치지 못하는 중흥의 이름값 역시 직원들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냈다.

중흥 측은 처우 개선을 약속하면서 불안한 사내 민심을 달래고 있다. 문제는 부채비율을 100%까지 낮추겠다는 목표도 함께 내세웠다는 점이다. 인건비를 늘리면서 추구하기에는 다소 모순되는 과제다.

얼마 전 만난 취재원은 “일단은 임금을 올려주겠다는 말을 믿고 기다리는 직원들이 많지만 자꾸 부채비율을 강조하니 반신반의하는 것 같다“며 “산은 관리 속에서 그동안 재무에만 신경 쓰느라 맨파워가 우후죽순 빠져나갔는데 이번에도 임금 정상화가 지지부진하면 견디지 못하고 나갈 직원들이 상당할 것"이라고 말했다.

중흥그룹은 단계적 임금인상, 내실경영을 통한 임금인상 여건의 조성 등을 얘기하면서 신중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직원 처우와 재무 안정성. 어느 쪽을 우선할 것인지 밸런스를 맞추는 데 고심하는 분위기가 읽힌다.

대우건설을 삼켰다가 소화불량으로 휘청인 금호그룹의 사례를 봤으니 어찌보면 당연한 망설임이다. 2조 짜리 매물을 막 사들인 마당에 섣불리 임금을 대폭 올리기는 조심스러울테다. 하지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벌집에 강인한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구조의 견고함일까, 일벌의 집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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