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ll

전체기사

위기의 기업자문 시장을 살리려면

배장호 기자공개 2016-05-19 08:46:02

이 기사는 2016년 05월 17일 07:3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싸면서 좋은 것' 또는 '싸지만 좋은 것'을 원할 때마다 마음대로 구매하기란 쉽지 않다. 정말 유명한 할매식당이 10년 전과 변함없는 손맛에 밥 값까지 그대로인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예외다. 시장에서 가치를 인정받으면 합당한 수준으로 가격이 조정되기 마련이다. 물건 제조자나 서비스 제공자가 적정한 이익을 내지 못하면 물건을 만들 이유도, 서비스를 제공할 여력도 없다. 봉사나 자아 실현을 목표삼지 않는 이상 그런 사업을 계속 이어가기 어렵다.

동아시아의 주요 자본시장 중 하나로 꼽히는 한국에서 글로벌 투자은행들이 발길을 돌린다. 바클레이즈 IB가 라이선스를 반납하고 떠났고, 한때 100명이 넘던 '그 많던' 맥쿼리 투자은행 사람들도 사라졌다. 한때 벌지브라켓 부럽지 않다던 UBS는 조직이 쪼그라 든 채 명맥 유지하기도 버겁다. RBS도 라이선스 문제가 정리되기를 기다릴 뿐 사실상 철수한 거나 매한가지다. 남아있는 외국계 IB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다. 눈이 휘둥그레질만큼 대단했던 IB들의 성과급 잔치는 옛말이 된지 오래다. 조직은 점점 줄어들고, 본사의 경비 통제 압박은 날로 심해진다. 화려한 스펙과 커리어를 가진 '능력 좋은' 뱅커일수록 이 바닥을 먼저 떠난다. 외국 투자은행 본사 입장에서 한국 자본시장은 돈 안되는 시장에 불과하다.

회계법인이 받는 감사보수만큼 오르지 않는 가격이 또 있을까 싶다. 할매식당도 아닌데 '10년 전 가격 그대로'다. 한때 유망 전문직으로서 선망의 대상이 됐던 대형 회계법인 회계사는 또래의 대기업 사원보다 못한 처우를 받는다. 법무법인인들 예외일까. 변호사 수가 늘어나고 외국 로펌까지 국내 법률자문 시장에 진출하면서 경쟁은 상상을 초월한다. 골라잡아 수임하던 시절은 추억이 된지 오래고, 아무리 크고 인지도 있는 로펌이라도 가격 경쟁에 나서지 않으면 일감 구하기 쉽지 않다.

일견 '세상 참 좋아졌다' 싶다. 이런 전문가 집단을 고용하는데 비용이 많이 낮아졌으니 말이다. 변호사 자문을 받는데 상전 모시듯 했다는 옛날 얘기를 들으면 그게 어느 나라 얘긴가 싶기도 하다. 외국 IB 문턱이 낮아지면서 이젠 중소기업들도 외국 기업과의 M&A 거래 등에 외국 IB를 어렵지않게 고용한다.

그런데 이게 마냥 좋은 것 만은 아니다. 값을 치른 만큼 대접을 받는 건 실은 '질량보존의 법칙'에 버금가는 법칙이다. 가령, M&A를 하는 기업 실무자가 저렴한 비용으로 글로벌 IB를 고용했다며 자랑스럽게 경영진에게 보고할 지 모르지만, 제 값 치르고 고용할 때와는 전혀 다른 서비스를 받게 된다. IB가 투여하는 시간과 인원은 받기로 한 보수의 크기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외국 IB를 고용하는 최대 이점인 글로벌 네트워크도 어느 정도 비용을 써야 제대로 활용이 가능하다. 회계감사 역시 마찬가지. 회계법인의 수익구조가 열악해서는 제대로 된 회계감사를 받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국내 자문서비스 시장이 열악한 수익 구조 때문에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갈 수 있다는 점이다. 당장은 저렴한 비용에 만족할 지 모르지만, 장기적으론 국내 기업들 전체가 더 큰 비용을 치러야 할 지 모른다. 외국 IB들이 모두 철수하고 만다면 외화자금 조달은 과연 누가 할 것이며, 인바운드와 아웃바운드 M&A는 누가 수행할까. 머슴을 부려도 만족할 만한 세경을 줘야 도망 안가는 법이다. 주변에 먹고 살 곳이 많다면 도망갈 유인은 더 클 것이고, 결국 주인의 논밭은 금세 폐허가 되고 만다.

다시 강조하지만 '싸면서 좋은 것'은 흔치 않다. '싼게 비지떡'이란 옛말이 실은 진실에 가깝다. 이제부턴 제값을 치르고 제대로 된 자문서비스를 받겠다는 생각을 국내 기업들이 가졌으면 한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주)더벨 주소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영풍빌딩 5층, 6층대표/발행인성화용 편집인이진우 등록번호서울아00483
등록년월일2007.12.27 / 제호 : 더벨(thebell) 발행년월일2007.12.30청소년보호관리책임자김용관
문의TEL : 02-724-4100 / FAX : 02-724-4109서비스 문의 및 PC 초기화TEL : 02-724-4102기술 및 장애문의TEL : 02-724-4159

더벨의 모든 기사(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copyright ⓒ thebell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