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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진해운 '세번째 기적'은 없을까 [thebell note]

김창경 기자공개 2016-07-12 08:20:59

이 기사는 2016년 07월 08일 08:2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고(故) 조중훈 전 한진그룹 회장은 1967년 대진해운을 설립했다. 조 전 회장이 처음으로 설립한 해운사였지만 1차 오일쇼크를 이겨내지 못하고 해체됐다. 조 전 회장은 10년 뒤인 1977년 한진해운을 세웠다. 대진해운 운영과 해외 컨테이너선사의 하역 작업을 도우며 쌓은 경험이 만들어낸 결과였다.

올해는 한진해운이 출범한 지 40년째 되는 해다. 그동안 한진해운은 수차례 위기를 이겨냈다. 1978년 발생한 2차 오일쇼크가 첫 번째 위기였다. 물동량이 북미항로에서만 40% 감소했다. 경쟁이 심해지고 운임이 크게 하락했다. 국제해운이 도산했고 대한선주는 법정관리에 들어가는 등 국내 해운업계는 최악의 상황에 빠졌다. 2차 오일쇼크로 인한 불황은 1980년대 후반까지 지속됐다.

한진해운 역시 자본잠식에 빠질 정도로 재무상황이 악화됐다. 조 전 회장은 한진해운의 개혁을 위해 1986년 대한항공의 지원을 결정했다. 대한항공은 항공화물 운항원가가 높은 탓에 경비절감으로 원가를 낮추는 노하우를 알고 있었다. 조 전 회장은 이 노하우를 한진해운에도 접목시킬 계획이었다. 계획은 맞아떨어졌다. 한진해운은 개혁 1년 만에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한진해운은 1987년 두 번째 위기에 빠졌다. 정부는 한진해운이 회생불가 판정을 받은 대한선주를 인수해주길 요청했다. 대한선주를 도산시키기에는 하청업체, 채권단 등에 미치는 영향이 너무 컸다. 조 전 회장은 고심 끝에 대한선주 인수를 결정했다. 조건이 좋았던 것도 아니다. 총부채 7000억 원 중 4000억 원을 떠안아야 했다. 대한선주의 부실이 한진해운에 전이될 수 있었다.

대한선주 인수는 전화위복이 됐다. 대한선주는 국내에서 보유 선박이 가장 많았다. 한진해운은 1988년 대한선주와 합병하며 한국 최대 해운사가 됐다. 조 전 회장은 효율성이 낮은 대한선주의 선박을 처분하고 노선을 정리했다. 해외시장도 적극적으로 개척하며 사세를 키웠다. 이는 2003년 당시 세계 최대 해운동맹 'CKYH' 결성에 밑거름이 됐다.

여러번 위기를 헤쳐 온 한진해운도 글로벌 금융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했다. 2014년 말 조양호 회장은 최은영 유수홀딩스 회장으로부터 한진해운 경영권을 인수하며 회생에 힘썼다. 대한항공은 1조 원이 넘는 자금을 한진해운에 쏟아부었다. 그룹의 적극적인 지원에도 한진해운은 자율협약을 신청했고 조 회장은 경영권을 내려놨다.

한진해운의 향방은 불투명하다. 용선료 협상, 사채권자 채무조정 등의 과제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해야 한다. 아직 법정관리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한진해운의 법정관리는 청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대한선주 때와 같이 한진해운을 매입할 국내 해운사를 찾기란 불가능하다.

대마(大馬)가 꼭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채권단의 마음도 같다. 그러나 덩치가 클수록 직간접적인 파장이 확대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렵다. 한진해운이 정해진 규칙 안에서 다시 일어서는 '세 번째 기적'을 보여주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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