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24년 04월 17일 07:1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잘 헤어지는 게 잘 만나는 것보다 중요하다. 미움도 미련도 없어야 한다. 하물며 돈이 걸려있는 동업은 말할 것도 없다. 동업을 시작할 때 가장 중요한 건 역설적이게도 이별할 시기와 그 방법을 정해두는 것이라고 한다. 그만큼 언젠가 헤어지는 순간이 올 수밖에 없다는 의미다.최근 영풍그룹을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말이다. 영풍그룹은 장병희·최기호 명예회장이 1949년 함께 창업한 영풍기업사를 모태로 한다. 영풍은 장씨가, 고려아연은 최씨가 맡는 등 사업영역의 구분은 명확했지만 그룹 회장을 번갈아가면서 맡았고 전체를 아우르는 결정은 함께 했다. 한때 '우리는 하나'라며 굳건한 동업 관계를 강조했지만 지금은 완전히 적으로 돌아섰다.
언뜻 양쪽 모두 이해는 간다. 최씨 입장에선 자꾸 발목을 잡는 장씨에게서 어떻게든 벗어나고 싶을 거고, 장씨 입장에선 이제 와서 조금 잘나간다고 75년 이어진 관계를 무 자르듯 끊어내려는 게 마음에 들 리 없다.
다만 조금 솔직하게 말하자면 마음이 살짝 더 기우는 건 최씨 쪽이다. 양쪽의 갈등을 단순히 돈 잘버는 계열사를 향한 이권 다툼으로 보기엔 짚고 넘어가야할 점이 많기 때문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됐을까. 돌이켜보면 최씨 측의 '나이브함'을 우선적으로 들 수 있다. 균형을 이루던 양쪽의 지분율이 무너진 건 2000년대 들어서다. 당시 최씨 측은 신기술 도입과 재무 투자 등이 뜻대로 되지 않자 지분을 팔아 자금을 충당했다. 문제는 그 대상이 영풍과 장씨 측이었다는 점이다. 최씨 입장에선 이왕 파는 거 믿을 수 있는 상대에게 넘기자는 판단이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믿음의 대가가 다소 가혹하게 돌아온 셈이다.
장씨 측 역시 시대의 흐름 앞에 나이브했다. 사실 영풍과 고려아연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한 건 10년도 훌쩍 넘었다. 애초 규모 차이가 크기도 했지만 영풍 실적이 뒷걸음질하는 사이 고려아연은 꾸준히 성장해왔다. 양쪽의 투자 시계 역시 상반되는 모습을 보였다. 영풍의 투자 시계는 오래 전에 멈춘 반면 고려아연은 지난해에도 그리고 올해도 어김없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여태껏 안일하게 대응해놓고는 잘나가는 지금 중요한 의사결정 때마다 태클을 거는 걸 달갑게 여길 곳이 어디있을까. 최근 고려아연의 감정적 대응이 다소 촌스럽다 느껴지면서도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건 이런 이유에서다.
이미 아름다운 결별은 물건너간 지 오래다. 아니 지금으로선 결별 자체도 어려워보인다. 키는 고려아연이 아닌 영풍이 쥐고 있는 탓이다. 붙잡고 늘어지면 고려아연으로선 별다른 방법이 없다. 당분간 이혼도 별거도 아닌 애매한 동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따른 출혈 역시 양쪽이 감당할 몫이다.
누굴 탓할까. 제때 이별하지 못한 대가가 이렇게 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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