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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평가를 말할 자유 [강종구의 Question]

강종구 기자공개 2015-06-11 08:19:18

이 기사는 2015년 06월 10일 18:15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국내 자본시장에 신용평가사가 등장한 지 30년이 됐다. 회사채 시장의 인프라로 신용평가의 필요성을 인식해 정부가 한국신용평가를 설립한 게 1985년이다. 그 후 한국기업평가와 NICE신용평가가 세워져 지금의 3사 체제가 됐다. 사람으로 따지면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고, 이제는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홀로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할 나이다.

신용평가사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 우리 정부는 세 회사에 많은 특혜를 줬다. 신용평가의무제를 도입해 기본적인 먹거리를 제공했고 신용평가업 인가제를 통해 경쟁자의 진입을 막았다. 그 후 서울신용평가가 자산유동화증권(ABS)와 기업어음(CP)에 한하는 제한적인 인가를 받았지만 무의미했다. 그리고는 아무에게도 시장을 열어주지 않았다. 회사채를 발행할 때 반드시 2곳 이상의 신용평가사에게서 신용등급을 받도록 한 1994년의 복수평가제 도입은 특혜의 절정이다.

지난 30년 간의 '과점' 실험은 부질없다. 신용평가는 그 자체로서가 아니라 회사채시장의 인프라이기 때문에 중요하다. 그런데 전국에 금융·보험업을 제외하고 50만 개의 영리 법인기업이 있고, 그 중 대기업이 약 7만 개에 달하지만 회사채 신용등급을 보유한 기업은 고작 600개 정도에 불과하다. 99.9%의 국내기업, 99%의 대기업에게 신용평가는 남의 이야기일 뿐이다.

실험은 부질없을 뿐 아니라 실패에 가깝다. 국내 신용평가 시장은 '시장'이라고 부르기 민망하다. 3개 평가사가 매기는 등급은 95% 일치한다. 방법론도 비슷하고, 수수료도 큰 차이가 없다. 세 쌍둥이 같다. 당연히 경쟁은 서비스의 질이 아닌 영업력에 의해 이루어진다. 그들에게 차별화 전략이 필요없다. 품질도 가격도 점유율도 비슷하게 수렴한다. 신규 진입자가 없는 과점 시장의 전형이다. 활성화된 시장의 증거인 다양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장 큰 폐해는 신용등급의 인플레이션과 양극화 일 것이다. 의뢰를 받기 위한 경쟁은 등급 퍼주기로 나타났고, 우량 기업에 대한 세 평가사의 등급이 AA급으로 수렴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어차피 망할 가능성이 낮은 기업이니 한두 등급쯤 올려줘도 문제없다는 인식이 만들어낸 병폐다. 독자신용등급 도입을 앞두고 최근 등급거품들이 조금씩 거둬지는 정상화 과정은 그나마 다행이다.

반대로 BBB등급 이하 기업은 자취를 감췄다. BBB를 받을 만한 기업이 없는 것이 아니라 주고싶지 않아 한다. 괜히 부도라도 나면 자신들의 부도율이 올라가고 그로 인해 평판에 금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행태는 저신용등급의 부도율 상승으로 이어졌다. BBB이하 등급이 점점 줄어 모수가 적다 보니 한두 개 회사만 디폴트에 빠져도 부도율이 급상승한다. 신용평가사 스스로 중견·중소기업들이 회사채 시장에 진입하는 걸 막은 셈이다.

시장의 감시자(Watch Dog)로서 역할도 제대로 못했다. 2008년 금융위기 전 건설사들의 프로젝트파이낸싱(PF) 우발채무가 시장의 붕괴를 우려할 정도로 팽창했지만, 신용평가사들의 대응은 늦었다. 부동산PF가 주로 증권사를 통해 ABS나 ABCP로 유동화되는데, 건설사 신용등급을 먼저 내렸다가는 그 어마어마한 유동화시장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랐다. 국내 신용평가사의 치부다.

정부의 신용평가 정책은 실패의 출발이었다고 본다. 자본시장 인프라로 신용평가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은 했지만 정책의 실행은 신용평가 따로, 회사채시장 따로였다. 금융당국에서 신용평가를 담당하는 부서는 중소금융과 등 회사채시장은 물론 신용평가와도 하등의 관계가 없는 곳이었다. 지금의 금융위원회 주무부서도 자본시장과가 아닌 공정시장과에서 맡고 있다. 자본시장의 발전을 위해 신용평가를 고민할 이유가 없는 팀이다. 그러니 회사채시장을 위한 신용평가와는 관련이 적은 순환평가제, 수수료지급모델, 행동규범 등에나 신경을 쓰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런 정책들의 상당부분이 기존의 과점 신용평가사들의 기득권을 지켜주는 방향이다.

정부의 배려와 보호 아래 세 평가사는 수익성 높은 우량 회사로 성장했다. 매출은 꾸준히 늘고 영업이익률이 20%를 넘나든다. 신용평가업 외에도 컨설팅업, 크레딧뷰로 등을 영위하며 사업을 확장해 가고 있다. 그리고 그중 한국기업평가와 한국신용평가의 주인은 글로벌 신용평가사인 피치와 무디스로 바뀌었다. 우리나라 자본시장의 중요한 인프라가 외국 자본에 넘어갔다. 당기순이익의 거의 전부를 배당으로 받아 간다. 국내 회사채시장이나 신용평가시장의 발전 따위는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다.

신용평가시장을 선진화하고 싶다면 선진화된 시장이 어떤 형태인지 보면 된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2000년대 초 엔론사태와 월드컴사태가 터진 후 이에 대한 반성으로 신용평가의 진입장벽을 낮추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꿨다. 그로 인해 공인 신용평가사(NRSRO)가 10개 사로 대폭 늘었는데, 그 중에는 애널리스트가 5명 밖에 안되는 Egan Jones 같은 곳도 있다. 정부가 신뢰성을 인정한 '공인'업체가 그렇다는 것이니, 공인을 받지 않고 신용등급을 내고 있는 '비공인' 신용평가사들도 있다는 얘기다.

NRSRO가 크게 늘었어도 S&P, 무디스, 피치 3강의 시장지배력은 유지됐다. 그러나 신규 진입자들의 등장은 기존의 강자들을 자극시키기에 충분했다. 3대 신용평가사는 신용평가방법론의 재정비, 서비스품질의 제고 등을 통해 시장의 격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반면 우리나라는 정부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아예 신용평가업을 할 수 없다. 심지어 단기사채법이 도입되면서 기업어음의 상당부분이 단기사채화되고 있는데, 서울신용평가는 단기사채에 대한 신용평가를 할 수 없다. 단기사채가 곧 기업어음의 다른 이름이지만, 서울신용평가는 기업어음에 대해서만 인가를 받았지, 단기사채에 대한 인가는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서면계약에 의하지 않고서는 신용등급(무의뢰등급)을 매길 수도 없다. 신용평가 시장에 신규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무의뢰등급을 통해 역량을 검증받아야 하는데 아예 그럴 기회를 차단한 것이다. 2013년에는 한 증권사에서 200여개 기업의 신용등급을 자체적으로 발표했다고 치도곤이 나기도 했다. 신용평가 정보는 오로지 기존의 3사를 통해서만 받으라는 얘기다.

신용평가는 금융의 언론이라는데, 우리나라에는 신용평가를 말할 자유가 없다. 글로벌 스탠다드와는 완전히 거꾸로 가는 행보다. 금융위기 이후 전 세계는 위기에 대한 반성으로 '신용평가 의존도 축소'라는 아젠다를 설정했다. 신용평가사의 신용등급에만 의존하지 말고, 시장에서 자체적인 신용분석 능력을 키우고 신용평가와 관련된 논의를 활발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아젠다가 설정된 게 바로 서울에서 열린 G20회의였다. 그런데 우리는 신용평가에 100% 의존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혹자는 듣보잡 신용평가사가 새로 등장하면 신용등급을 마구 퍼줄 것이고 신용평가의 질도 떨어질 것이라고 한다. 그럴 수 있다. 그래도 신용등급의 95%가 일치하는 이상한 시장보다는 낫지 않을까. 또 애널리스트가 5명 뿐인 Egan Jones가 무디스를 전면적으로 이길 수야 없겠지만, 한두 가지 분야에서는 나을 수도 있다. 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Egan Jones의 신용등급 조정이 주가나 금리에 무디스보다 더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오는 12일 임종룡 금융위원장이 주재하는 '금요회'의 주제가 신용평가 선진화 방안이라고 한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그동안 그랬던 것처럼 회사채 시장과는 따로 노는 아젠다들의 재탕이 될 것이다. 기존의 신용평가 3사는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고자 최대한 목소리를 낼 것이다. 임종룡 장관의 눈은 손끝을 향할까, 달에 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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