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는 2017년 05월 30일 08:0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생전 서예를 배우며 많이 남긴 글씨는 '경청'(傾聽)이었다. 아들인 이건희 회장과 손자인 이재용 부회장에게도 '경청'이란 휘호를 남겼다. 리더의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경청을 꼽으며 실천을 당부했다.이재용 부회장은 요즘 애먼 곳에서 경청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 4월초부터 진행된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의 뇌물 수수 피의자로 재판을 받고 있다. 주 3회 진행되는 재판에 꼬박꼬박 참석해 재판 과정을 지켜보고 있다.
재판 과정은 지루하다. 검찰은 증거로 제출한 서류를 기초로 증인에게 이렇게 증언한 것이 맞는지 재차 확인하고 변호사는 논리의 맹점을 지적한다. 주요 증언을 재확인하는 과정이 주를 이룬다. 짧게는 하루 몇시간, 길게는 15시간 동안 재판이 진행돼 왔다.
참석자 중 일부는 지루함을 못 견디고 졸기도 했다. 함께 재판을 받는 전직 삼성 미래전략실 주요 임원들도, 심지어 변호사나 검사도 조는 모습이 취재진 눈에 띄었다. 재판관까지 깜빡 졸음을 못 참는 경우도 있었다. 이 부회장은 20차례 재판 과정에서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경청하고 있다.
재판이 지루한 것은 한국식 재판의 특성이기도 하다. 서류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식 재판에선 대부분의 주장을 문서화해 재판부에 전달하고 판단을 구한다. 미국의 법정 영화처럼 검사와 변호사가 설전을 벌이고 증언의 맹점을 꼬집어 극적인 반전을 이루는 것을 한국 재판장에선 보기 힘들다.
더욱이 이번 재판에서 특검이 제출한 대다수 증거엔 힘이 실려 있지 않다. 20차례 재판이 진행됐고 몇 만페이지에 달하는 증거를 다시 검토하고 있지만 확실한 증거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핵심 증인이라는 인물이 돌연 불참하기도 하고 증언을 중언부언하는 모습도 나왔다. 검찰이 제시한 핵심 증인인 박원오 전 승마협회 전무는 출석 당일 돌연 연락이 끊겼고 김찬형 전 비덱스포츠 재무담당은 증언의 신빙성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김 씨는 '삼성에서 최 씨 모녀에게 말을 사준 것 같다'는 취지로 한 진술에 대해 "특검 사무실에서 정황을 검사가 얘기해줬고 그 부분에 대해 부정할 수 없었다"고 말해 재판관으로부터 "아는 것만 진술하라"고 지적을 당하기도 했다. 검사가 말한 내용이 진술이 되고 서류가 돼 증거로 채택된 상황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경청'을 평소 소신으로 삼았다고 한다. 문 대통령은 최순실 국정 농단에 대해 제대로 다시 조사하라는 지시도 내렸다. '제대로' 조사하라는 것이 제대로 꿰맞추라는 말은 아닐 것이다.
이 부회장이 정관계에 대가를 바라고 뇌물을 줬다면 합당한 벌을 받는 게 타당하다. 하지만 억지로 꿰어 맞춰진 증언과 꾸며진 조서를 통해 죄를 묻는 것이라면 곤란하다. 더욱이 이번 사태의 본질은 삼성이 아닌 '국정 농단'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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