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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유럽 철도의 지정학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4-03-15 09:00:43

이 기사는 2024년 03월 15일 08: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발트 3국인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는 18세기부터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 있었거나 러시아의 일부였기 때문에 인프라가 러시아 표준으로 건설된 것이 많은데 철도가 대표적이다. 러시아의 철도는 표준궤간(1.435mm)보다 넓은 광궤(1.524mm)여서 발트 3국의 철도도 광궤다.

2004년에 3국이 EU와 NATO에 가입하면서 EU 경제권과 인프라를 통합할 필요가 커져 철도의 궤간을 바꾸는 프로젝트(Rail Baltica)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화물이든 승객이든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헬싱키에서 바르샤바까지 이어지는 870km의 철도 정비가 필요하다.

수차의 스터디와 타당성 조사를 거쳐 2017년에 발틱 3국 의회가 모두 프로젝트를 승인했다. 2025년에 착공해서 최장 15년 공기다. 15년은 핀란드와 연결되는 해저 터널까지 다 완공되는데 필요한 시간이어서 육상은 훨씬 전에 완공될 것으로 보인다. EY의 조사보고서에 의하면 공사비 견적은 58억 유로인데 경제적 효과는 162억 유로다.

광궤를 사용하게 된 이유 중 하나는 안보다. 특히 과거에는 병력과 군수물자를 거의 철도로만 실어 날랐기 때문에 궤도가 달라지면 진군과 점령지 유지가 매우 불편해진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와 같은 광궤 철도를 사용하지 않았다면 전쟁의 양상이 달랐을 것이다. 스페인도 광궤를 사용하는데 프랑스를 의식한 것이다. 지금과 달리 스페인이 철도 건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했을 때 양국 간 사이가 안 좋았다.

그러나 러시아는 러시아가 독일을 염두에 두고 광궤를 택했다는 시각을 부정한다. 지나치게 수세적으로 보이고 체면이 상하기 때문일 것이다. 러시아 군은 이미 1841년에 철도를 사용한 적의 진격을 늦추는 방법으로 궤도 교체보다는 교량이나 터널의 폭파가 더 효과적이라는 입장을 내놓았다. 그러나 러시아가 건설해 준 중국의 광궤 철도를 중일전쟁 때 일본이 표준궤로 교체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중국이 숨을 돌렸다는 기록이 있다.

표준궤나 광궤가 아닌 협궤(1,067㎜와 1,000㎜)를 사용하는 나라들이 있다. 건설 속도가 빠르고 비용이 적게 들어가기 때문이다. 필리핀, 인도네시아, 일본(신칸센은 표준궤다), 대만, 말레이시아, 베트남 등이다. 교통량이 적은 곳이나 산악지방에서는 굳이 다른 궤를 쓸 이유가 없다. 스위스다. 열대우림, 광산지역에도 적용된다. 식민지다. 심지어는 762㎜도 있다. 협궤 철도는 철거와 이설도 용이하다. 그런데 협궤의 모든 장점은 전쟁 수행에 딱 다 들어맞는다. 1차대전 때 유럽에서 사용되었던 철도는 거의 다 협궤 철도였다. 신속히 부설하고 필요하면 철거, 이설하거나 후퇴하면서 파괴했다.

항공기나 선박과는 달리 기차는 그 자체가 무기는 아니다. 그러나 기차는 지정학의 관점에서 매우 중요한 모빌리티를 제공한다. 기차는 효율적인 무력 투사 수단이다. 1차 대전 이래로 주로 기차가 병력과 장비를 전선으로 옮겨주었다. 특히 유럽에서는 전시에 해양과 강을 활용하는 효용이 크지 않아서 기차가 1차 운송수단이었다. 기차는 배보다 적군에 대한 노출도 덜하고 배보다 빨리 움직인다. 항구나 공항 같은 터미널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어디서나 정지할 수 있다. 배와 비행기가 가지지 못하는 강점이다.

기차에서는 다수 인원 승하차에 가장 적은 시간이 걸린다. 객차의 수가 많아 전체가 길어지면 VIP 공격 목표물의 위치를 정확히 탐지하기도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히틀러를 포함한 최고 지휘관들이 전용 기차를 운용했다. 기차는 공간이 넓어 편안한 호텔 역할도 할 수 있어서 이런저런 시간도 절약하게 해 준다.

기차의 유일한 단점은 운행 경로가 정해져 있고 궤도가 파괴되면 기동할 수 없다는 정도인데 적군도 탈취해서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철로는 쉽게 파괴하지도 않고 파괴되어도 복구가 비교적 쉽다. 철도의 잘못은 아니지만 철도의 발달이 없었다면 1차대전의 규모는 훨씬 작 았을 것이고 세계사는 지금과 다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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