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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예술기관 톺아보기]'예술감독' 사라진 예술의전당④[조직]관료출신 예술계 불만, 공석에서 도입→축소→폐지로 단계적 변화

고진영 기자공개 2024-05-23 08:16:36

[편집자주]

공공극장은 공간을 넘어서는 가치를 지닌다. 창조의 장이자 공연 문화의 산실이다. 국내 첫 국립국장은 1950년 부민관에서 개관했다. 이후 뚜렷한 거처 없이 피난지였던 대구 문화극장, 명동 시공관 등을 전전하다 1973년 남산 기슭에서 새로 문을 연다. 문화예술진흥법이 막 제정되면서 문화정책 기틀이 자리잡았던 때다. 그리고 1978년 세종문화회관이 설립. 1988년엔 서울올림픽을 기점으로 '신(新) 국립극장'이라 할 수 있는 예술의 전당이 만들어졌다. 이제 70년의 역사를 지난 공공극장의 현재는 어떨까. 더벨이 살펴본다.

이 기사는 2024년 05월 21일 08:1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예술감독은 극장 예술에 대한 총체적 책임을 지는 위치다. 예술의전당 초대 예술감독인 조성진 연출가는 "예술감독이란 작품을 만드는 '장이'들이 작가정신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도록 판을 짜주고 전체적인 조율을 해주는 또다른 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애초부터 예술의전당은 예술감독제를 염두에 두고 설립됐다. 1987년 개관할 때 예술감독 직제를 만들어 놨는데 10년 가까이 자리가 비어 있었다. 전속 오페라단이나 오케스트라가 없다는 이유로 예술감독 선임이 미뤄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체제가 장기간 계속되자 여기저기서 쓴소리가 흘러 나왔다. 예술의전당 간부들이 예술을 모르는 관료 출신이라 순수예술 기획엔 관심이 없다는 예술계의 불만이었다.

◇예술감독직 '장기 공석'과 예술계 반발

실제로 1990년대 초반 예술의전당은 사장을 비롯해 예술사업본부장, 기획운영본부장, 감사 등 임원 4명이 모두 문화부 관리 출신으로 구성됐다. 부장급 이상 직원 중에서도 예술분야 출신 인사가 전무했다.

당시 일선 직원이 '교향악축제'를 예년처럼 기획해 결재를 요청했더니 "관객 동원도 어려운데 왜 자꾸 일을 벌이느냐"고 담당 간부가 타박했다는 얘기가 내부에서 화제된 일도 있다. 교향악축제는 1989년 이후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열리고 있는 예술의전당의 대표 음악회 시리즈다.

2024년 4월 3일 열린 교향악축제 개막식

사정이 이랬던 만큼 공연업계에선 예술감독직을 선임해야 한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았다. 게다가 글로벌 예술계 정보에 뒤처지지 않고 저명한 연주단체를 초청하기 위해서도 해외 네트워크가 있는 예술감독이 필요했다.

문제는 예술의전당이 적임자 찾기에 번번이 실패했다는 데 있다. 1993년 즈음엔 정명훈 지휘자가 예술감독으로 부임, 바스티유 오파라단과 음악감독직을 겸임한다는 설까지 돌았으나 소문에 그쳤다.

예술감독직이 채워진 것은 1995년이다. 예술의전당 측은 연초 구조개편과 함께 예술감독실을 신설하는 등 예술감독제 도입을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이종덕 당시 예술의전당 사장이 "조건을 고루 갖춘 사람을 찾기 쉽지 않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자체 기획공연' 기반 마련한 초기 예술감독

그러다 1995년 5월 초대 예술감독 겸 공연사업본부장으로 발탁된 이가 오페라연출가 조성진 씨(사진)다. 예술의전당은 미술을 제외하고 음악과 오페라, 무용 등 공연 전분야의 기획감독에 대한 전권을 그에게 맡겼다.

조 감독은 오스트리아빈 대학에서 연극학, 빈 국립대학에서 오페라 연출을 전공했던 인물로 서울오페라단 <아이다>, 국립오페라단 <리골레토> 등을 연출했다. 취임하면서 "처음부터 가시적 성과를 기대하진 말라"고 당부했지만 예술감독 자리에 쏟아지던 관심은 유별났다. 예술감독 부임을 계기로 전문가 중심의 기획공연이 늘어나길 바라는 기대가 공연계에 퍼져 있었다.

조 감독 역시 "자체 기획공연이 없다면 예술의전당은 식물인간에 불과하다"며 자체공연 체제 다지기에 중점을 뒀다. 가장 먼저 개선한 것이 오페라가수의 기용 관행이다. 기존엔 오페라가수들이 선후배순으로 배역을 나눠가졌지만 조 감독은 기성가수를 상대로 공개오디션을 실시, 극장위주로 가수를 고용하는 유럽식 방식을 가져왔다. <박쥐>와 <피가로의 결혼> 등의 공연을 기획하기도 했다.

1998년엔 오페라연출가 문호근 예술감독이 배턴을 이어 받았다. 문 감독은 오페라계의 숙원이었던 '레퍼토리 시스템'을 들여왔다. 한 극장이 특정 작품들을 매시즌 고정적으로 공연하는 시스템인데 공연 무대와 의상을 재활용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유럽 등지에선 이미 보편화돼 있었지만 국내는 단발성 무대가 주류였던 탓에 제작비도 건지지 못하고 세트를 폐기처분 하는 등 낭비가 심했다.

문 감독은 민간오페라단 총연합회와 손잡고 <오페라 축제>를 기획, 레퍼토리 시스템 도입을 노렸다. 이 때엔 자리 잡지는 못했지만 문을 열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현재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매년 열리는 <호두까기 인형>, 자유소극장에서 개최되는 <어린이 가족 페스티벌> 등이 이런 레퍼토리 공연이다.

◇다시 자취 감춘 예술감독직

그러나 조직개편을 거치면서 예술의전당은 2001년 다시 변화를 맞는다. 예술감독직을 공연과 음악, 미술 등 분야별 3인 체제로 나누되 상임이 아닌 비상임 직책으로 바꿨다. 또 공연사업국을 신설해 예술감독에게 있었던 사업집행 권한을 넘겼다.

개편 배경을 두고 예술의전당 측은 지명도 있는 인사를 상임으로 초빙하기엔 어려움이 많았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임기 역시 3년에서 2년으로 줄어드는 등 사실상 의사결정권 없는 자문으로 존재 의미가 축소된 게 아니냐는 비판을 피하지 못했다.


역할이 위축되긴 했으나 명맥을 이어오던 예술감독제는 2010년을 끝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당시 정관 개정을 통해 예술감독 직제를 없앴는데, 거의 1년에 달하는 논의를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은 예술감독 없이 사장 휘하에 경영본부, 공연예술본부, 예술협력본부를 거느린다. 서고우니 공연예술본부장을 포함한 본부장 모두 예술계 인사가 아닌 내부 승진 케이스다.


◇자생력의 파편, 아쉬움 '여전'

이런 단계적 직제 변화에는 국내 예술계의 달라진 위상이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해외 교향악단이나 오페라단은 한국을 잘 찾지 않았다. 일본을 방문하는 공연팀이 한국까지 거쳐가도록 일정을 조율해오는 것이 고작이었다. 걸음마 단계였던 순수예술 생태계에서 예술감독의 전문성이나 인맥 없이 공연을 기획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였다는 뜻이다.

하지만 갈수록 관객과 민간 기획사들이 늘어나면서 내부 역량이 쌓이고 공연 환경도 차츰 나아졌다. 예술감독직을 폐지한 2010년은 자생력을 갖추기 시작한 예술의전당이 공공기관으로서 역할에 대해 맹렬하게 고민해야 했던 시기다.

예술의전당 관계자는 "2010년쯤부터 공공성에 더 집중하게 되면서 대외 전문가 보다는 내부에서 노력해야 할 부분이 크다고 느꼈다"며 "예술감독제를 더이상 운영하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한 배경"이라고 부연했다.

현재 예술의전당은 자체 예술감독이 없는 대신 국립발레단 예술감독, 국립오페라단 예술감독, 국립합창단 예술감독을 상임이사로 두고 있다. 공연 심의위원회 등에 있어서도 전문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의견을 들을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되어 있다는 설명이다.

다만 장기적인 기획으로 공연 수준을 끌어올리고 공연간 예술적 균형을 조율하려면 예술감독이 필요하다는 의견은 일각에서 여전히 나온다.

예술계 관계자는 "런던 바비칸센터나 뉴욕 카네기홀, 링컨센터 등 세계적 공연장은 모두 예술감독(Artistic Director)을 두고 있다"며 "예술의전당이 행정직 중심으로 운영되는 것은 사업적 이유 등 여러 사정이 있지만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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