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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스트 재벌시스템]대표이사-의장 분리, 거버넌스 개선 '필요조건' 일까'분리=선진적 거버넌스' 기계적 해석, 해외서 겸임 사례도 다수

박기수 기자공개 2020-06-09 11:02:22

[편집자주]

세계 최대 농업·식품회사인 카길은 비상장이고 가족지배 기업이지만 현재 가족이 경영하지 않는다. 세계적 플랫폼 기업 구글도 창업자들이 1선에서 모두 퇴진, 인도 출신 순다르 피차이가 최고경영자(CEO)를 맡고 있다. 소유·경영의 분리 사례다. 자본시장의 역사가 짧은 한국 기업은 태생적으로 소유·경영의 융합모델이 주류를 이룰 수밖에 없었다. 고도 성장과 빠른 의사결정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너경영 3·4세 시대에 접어들며 변화를 요구받는다. 국내 대표 기업 삼성이 그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파장을 가늠하기 어렵다. 지배구조 뿐 아니라 이사회·내부통제·조직구성에 까지 영향을 줄 사안이다. '포스트 이재용 선언'은 곧 '포스트 재벌시스템'이다. 이재용 선언 이후의 재벌시스템, 나아가 4차산업혁명 이후의 재벌시스템을 조명해본다.

이 기사는 2020년 06월 04일 16:14 더벨 유료페이지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작년 주주총회 시즌 SK그룹이 재계의 이슈가 된 적이 있었다. 지주사 SK㈜의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하기로 하면서다. 기존에 양 직책을 겸하고 있었던 최태원 회장이 이사회 의장직을 염재호 고려대학교 총장에게 넘겨주면서 분리가 이뤄졌다. 재계에서 SK그룹이 선진적인 거버넌스를 추구한다며 찬사를 보냈다. 지배구조연구소 등에서도 이사회의 독립성이 제고됐다며 좋은 평가를 보냈다.

재계가 SK그룹의 변화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이유는 또 있었다. 오너 기업 내 오너가 스스로 탈권위를 외쳤다는 점 때문이었다. 형식적 탈권위인지 실질적 탈권위인지는 두고 봐야 하지만 제도가 개정되고 변화가 시작되는 점 그 자체에 의미를 뒀다. 국내 대부분의 대기업집단은 속히 '오너 한 마디면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는' 기업집단이라는 시선이 짙었다. 이런 점에서 오너가 자발적으로 권력의 일부분을 내려놓는다는 점을 업계가 이례적으로 바라본 셈이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왼쪽), 염재호 고려대학교 총장(오른쪽)

사실 SK그룹의 변화 이전에도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는 지배구조 개선의 필요조건처럼 여겨져 왔다. SK그룹의 변화 후에도 여러 대기업들이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를 시행했다. 우선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이 분리될 경우 이사회 내 권력의 무게추가 대표이사에서 다른 쪽으로 조금 쏠리는 효과가 있다. 이 경우 각 이사들이 독립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어 대표이사의 이사회 장악을 막을 수 있다. 독립성과 투명성이 올라갈 수 있다는 의미다.

다만 일각에서는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의 분리가 무조건 좋은 지배구조라고 해석하는 '기계적 해석'을 멀리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한 지배구조연구소 관계자는 "통상적인 케이스를 두고 봤을 때 이사회 내 대표이사에 권력이 집중돼있기 때문에 의장직은 사외이사나 다른 이사들이 맡는 게 이사회의 독립성을 끌어올릴 수 있는 방안"이라면서 "다만 기업 별로 이사회가 처한 상황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이를 일반화해서 어디는 옳고 어디는 그르다고 판단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하다"고 말했다.

최근 한국거래소가 대기업들에 한해 공시 의무를 부여하는 '지배구조보고서'에서도 이사회 의장과 대표이사의 분리 여부가 '기업지배구조 모범규준 지표' 중 하나로 들어가 있다.

물론 거래소는 "핵심원칙을 구현하기 위해 기업지배구조에 관한 사항을 '실시하는 것'과 '실시하지 않고 이유를 설명하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좋다고 일률적으로 정할 수 없다"고 밝히고 있긴 하다.

다만 대표-의장 분리를 '모범규준'으로 정의하고 있다는 점을 미뤄봤을 때 겸임보다는 분리 쪽에 가산점을 두는 분위기다.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겸하고 있을 경우 왜 분리하지 않느냐에 대한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는 사실도 겸임보다 분리하는 형식이 더 바람직하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지배구조연구소 관계자는 "대표이사와 이사회 의장을 분리한다고 하더라도 국내 대기업들이 오너 기업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을 뿐더러 오너 경영인 목소리의 중요성은 그대로다"면서 "이 경우 지배구조 점수를 잘 받기 위해 형식적으로 두 지위를 분리하는 것은 필요없는 비용을 초래할 가능성 있다"고 분석했다.

실제 글로벌 기업의 경우에도 CEO가 이사회 의장을 겸임하는 경우가 빈번하다. 미국의 아마존(Amazon)과 독일의 폭스바겐(Volkswagen)이 그렇다. 아마존의 제프 베조스(Jeff Bezos)와 폭스바겐의 허버트 디에스(Herbert Diess)는 각 사의 CEO와 의장을 모두 겸하고 있다. 페이스북의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 역시 페이스북의 CEO면서 이사회 의장이다.

물론 이들 기업 역시 지배구조 측면에서 논란이 없지는 않지만 두 직위의 분리가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는 대표이사의 온전한 책임경영과도 연관이 있다.

재계 관계자는 "이사회의 독립성 추구를 위해 대표이사와 의장직이 분리되고 있는 것이 글로벌 추세이긴 하나 이사회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어느 쪽이 옳고 그르다를 쉽게 말할 수는 없다"며 "특히 경영 성과에 따라 투자자들이 책임을 물을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한데, 대표와 의장이 분리돼있을 경우 겸임때와 달리 책임 소재가 불분명해지는 점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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