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ll

전체기사

[김화진칼럼]화이트 슈 로펌의 변모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23-03-02 09:00:31

이 기사는 2023년 03월 02일 09: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크라바스(Cravath, Swaine & Moore)라는 미국 로펌은 널리 알려진 이름은 아니다. 변호사 수 500명 남짓이어서 미국 기준으로는 대형 로펌도 아니다. 미국 로펌 열곳이 변호사 수 2천 명을 넘는다. 그러나 누구든지 크라바스를 미국 최고의 로펌이라고 말한다. Vault 100라는 로펌 평가 사이트에서 항상 1위다. 소송과 M&A가 중점이다. 크라바스 변호사들이 오만하다는 말이 돌아다니기도 하는데 아마도 그 위상 때문일 것이다.

미국에서는 명망있는 최상위급 전문펌을 화이트 슈(white shoe) 펌이라고 부른다. 로펌, 월스트리트 투자은행, 회계법인, 컨설팅펌 등 이다. 뉴욕이나 보스턴에 터잡아 100년 이상 되었고 아이비리그 출신 들을 주로 채용한다. 초기에는 보수적인 앵글로색슨계 백인 개신교도 (WASP)들이 그에 해당되었다. 지금은 단순히 엘리트 펌의 의미로 쓰인다. 이 화이트 슈 모델을 탄생시킨 사람이 크라바스의 폴 크라바스였다. 화이트 슈 펌들은 모두 이른바 ‘크라바스 시스템’을 채택해 운영된다.

크라바스는 주교황청 미국대사를 지낸 리처드 블래치포드가 1819년에 창업했다. 4년 후에 후일 링컨 대통령의 국무장관이 된 절친 윌리엄 시워드가 합류해 파트너가 되었다. 세 번째 파트너는 아들 새뮤엘 블래치포드였고 후일 연방대법관이 되었다. 1899년에 폴 크라바스가 합류해 오늘날 크라바스의 원형을 갖추었다. 폴 크라바스가 정립한 크라바스 시스템은 변호사 채용과 교육훈련, 보상체계 등을 아우르는 독특한 로펌 운영체계다. 1901년 크라바스의 이름이 펌 이름에 추가되었고 현재의 명칭은 1944년에 정립된 것이다.

크라바스는 초창기에 굿이어, 웨스팅하우스 등 기업을 자문했고 특히 유니언퍼시픽 등 철도회사들과 인연이 각별했다. CBS, JP모건, 웰스파고 등 기업과는 19세기부터 인연을 유지하고 있다. 미국 역사에 남은 대형 소송사건들을 통해서도 유명해졌다. 2014년 11월에는 대형 M&A 3건을 같은 날 마무리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크라바스 시스템에서는 경력 변호사 채용은 거의 없고 신입 변호사들을 로스쿨에서 성적 위주로 채용한다. 신입 변호사는 입사 후 기업법무의 다양한 부서를 순환 근무하면서 훈련을 쌓게 된다. 보수는 이제 ‘크라바스 스케일’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는 사전 공개된 스케일에 따라 지급된다.

미국 로펌계에서 내려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샘 버틀러(Samuel Butler, 77) 변호사 이야기다. 크라바스의 1년차 변호사였던 버틀러가 자기가 담당했던 M&A 딜 클로징 테이블에 ‘바이블’을 가지고 나타났다는 것이다. M&A 딜이 하나 마무리되면 엄청난 서류와 자료가 쌓인 다. 소송전까지 가미되었으면 몇 배가 된다. 그런데 거래의 진행 중에 는 수많은 초안들이 작성되고 교환되기 때문에 클로징 후에 최종적인 서류를 찾아서 체계적으로 정리해 두는 작업이 필요하다. 양이 너무 많아서 책자로 묶어두고 큰 딜의 경우 십수권이 되기도 한다. 이를 바이블이라고 부른다. 통상 신출내기 변호사들이 담당한다.

하버드 로스쿨을 차석으로 졸업한 버틀러는 후일 크라바스의 12 대 대표변호사(Presiding Partner)가 되었다. 1980~1998년간 거의 20년 동안 대표였다. 사실 클로징에 바이블을 가지고 나타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에 좀 과장된 일화일 것이다. 모든 서류를 빠짐 없이 일목요연하게 정리해서 가지고 왔다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데 1956년의 일이다. 디지털은 물론이고 아직 복사기도 없던 시대다.

화이트 슈 펌의 원조인 크라바스의 현재 대표변호사(16대)는 화이자 사이드다. 2017년부터 펌을 이끈다. 그런데 파키스탄계 여성 변호사다. 버클리대와 하버드 로스쿨을 나왔다. 크라바스 최초의 여성 대표변호사이기도 하다. 2018년 크라바스에서는 파트너 승진자 3인이 전원 여성이어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 2022년 기준 미국 변호사의 38%가 여성이고(1951년에는 3%였다) 연방법원 판사의 30%가 여성이다. 세월이 흘러 화이트 슈의 의미도 이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주)더벨 주소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영풍빌딩 5층, 6층대표/발행인성화용 편집인이진우 등록번호서울아00483
등록년월일2007.12.27 / 제호 : 더벨(thebell) 발행년월일2007.12.30청소년보호관리책임자김용관
문의TEL : 02-724-4100 / FAX : 02-724-4109서비스 문의 및 PC 초기화TEL : 02-724-4102기술 및 장애문의TEL : 02-724-4159

더벨의 모든 기사(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copyright ⓒ thebell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