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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비싼 네 글자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공개 2009-12-08 11:42:07

[편집자주]

자본시장 발전에 신용평가는 인프라와 같은 존재입니다. 서브프라임사태로 신용평가의 공정성이 도마위에 오르고 있는 것도 신용평가의 중요성을 재차 일깨우는 사건입니다. 더벨은 신용평가를 포함해 크레딧시장의 전반을 전문가의 날카로운 시각을 통해 분석합니다. 신용이슈 등 일련의 현상에 대해 폭넓은 이해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기사는 2009년 12월 08일 11:4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영어에서 가장 비싼 네 단어는 Its different this time(이번만은 다르다)이다. 위대한 투자가 존 템플턴 경이 신경제에 도취한 시장을 향해 던진 유명한 경구다.

크레딧 애널리스트로서 작게는 회사채 시장, 조금 크게는 기업금융(IB) 비즈니스를 지켜 보며 갖게 된 생각을 감히 위대한 투자가의 말씀에 빗대어 보자면, 기업금융에서 가장 비싼 네 글자는 단기 성과가 아닐까?

◇ 부주의한 성장

금융위기가 닥치면 곧장 나쁜 경영에 대한 마녀 사냥이 벌어진다. 하지만 한 가지 쉽게 간과되는 것이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시장이 바로 그 경영자와 의사결정에 찬사와 환호를 보냈었다는 엄연한 사실이다.

추락하는 모든 것은 날개가 있다. 위기가 일반적인 실패와 다른 것은 직전에 빛나는 성공이 있었다는 점이다. 투자자들이 그 성공에 한 자리 끼기 위해 엄청난 자금을 경쟁적으로 몰아주고, 그 자금의 힘으로 성공은 거품처럼 커진다. 이런 선순환 속에 커진 거품이 의외의 계기로 터지면 바로 위기로 내닫는다. 성공이 바로 실패의 아버지인 셈이다.

여기에서 아주 간단하지만 적중률은 매우 높은 위기 지표가 나온다. 성숙기 산업이 20% 이상의 성장을 2년 이상 지속하면 거의 예외 없이 위기가 온다. 소위 부주의한 성장(Reckless growth)이다. 최근의 건설부동산, 해운, 조선과 지난날의 신용카드 산업이 모두 이런 경우였다.

사실 매출과 자산이 크게 증가해도 레버리지만 낮다면 자산 거품도 두려울 것이 없다. 아니 그러면 거품이 아니다. 문제는 이런 레버리지 확대를 시장이 놓친다는 것이다. 성장의 단맛에 취해 눈이 어두워진 것인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여러 차례 위기를 겪었던 시장의 조정능력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런데 역사는 반복되지만 똑같지 않다. 게임의 법칙이 변한다. 그 변화를 이해하고 대응하는데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 새로운 게임의 법칙

레버리지에 대한 게임의 법칙이 크게 3가지 방향에서 변화가 있었다. 금융혁신과 새로운 산업, 규모의 변화가 그것이다.

금융혁신은 자원의 효율적 활용에 큰 기여를 했다. PF, LBO, PE 등은 기업금융의 새 장을 열었다. 하지만 이에 따른 레버리지 확대는 곧잘 간과된다. 사실상의 차입금이지만 기술적인 이유로 재무제표에서는 누락되는데다가, 자산-부채 Matching구조(사실상의 담보)라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자산과 부채의 유동성이 달라 유동성 위기에 취약하다는 점은 주목 받지 못했다.

또 한편으로는 상대적으로 레버리지가 높은 산업들이 전면에 부상했다. 건설, 조선, 해운 등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기업금융의 확대 자체가 실질적인 레버리지를 크게 높였다. 이럴 때는 구성의 오류가 작용한다. 각각의 높은 레버리지는 나름의 합리성을 갖추고 있지만 모아 놓으면 구조적 부담이 된다. 이것 역시 유동성 위기의 파장이 급격히 확대되는 원인이 되었다.

더욱이 이들 산업들은 일반 제조업과는 다른 고유의 내부 레버리지를 가지고 있다. 각종 선수금(조선, 건설), 장기미지급금(선박금융 등), 용대선 체인 등은 성격상 급격한 차입금 증가로 돌변할 개연성을 안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채비율은 성장률과 비례하고 규모와 반비례한다. 성장률과 비례하는 것은 이해하기 쉽다. 소위 레버리지 효과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규모와는 반비례할까? 몸집이 커지면 유연성이 떨어진다. 큰 덩치가 무리하게 레버리지를 높여 고성장을 추구하면 다치기 쉽다.

우리 경제와 기업의 규모가 커졌다. 하지만 이에 따른 레버리지 가이드라인의 변화는 없었다.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다. 안정적 성장은 아직 우리 경제와 기업에게 사치로 받아들여진다.

◇ 단기성과의 유혹

새로운 게임의 법칙에 대한 자각은 항상 늦게 오는 법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지혜)는 석양에 날개를 편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 맞는 말이지만 과연 항상 그러한가? 위기를 겪는다고 모두가 교훈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실패한 역사는 없었을 것이다.

시장이 위기에 빠지는 것은 위기를 경고하는 카산드라나 위기의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저 무시한 것이다. 예언자의 위상이 낮아서나(카산드라는 공주의 신분이었다) 위기의 경험이 심드렁해서가 아니다. 바로 눈앞에 펼쳐진 현실(단기성과)을 부정하기가 그만큼 어렵기 때문이다.

어린이에게는 과자가, 청년에게는 연애가 가장 치명적인 유혹이다. 직장인에게 가장 큰 유혹과 위협은 어떤 것일까? 당연히 일자리다. 일자리를 지키고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해서는 성과가 필요하다. 정치인도 경영자도 공무원도 다 마찬가지다. 모두가 성과를 향해 달린다. 그게 잘못된 것은 아니다. 잘못된 것은 단기성과에만 몰입하게 하는 성과평가 구조다.

단기에 치우친 성과평가가 위험하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래도 여전히 단기평가에 치중하는 이유는 뭘까? 단기성과가 보다 측정하기 쉬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장기성과라고 측정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측정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문제다. 우리 시장의 투자 기관만 보더라도 안정된 조직일수록 단기성과에 대한 집착이 작다. 조직에서 인정 받는데 단기성과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최근 급성장한 조직은 인력의 순환도 빠르고 그만큼 단기성과에 연연하는 경향이 뚜렷하다.

◇ 빨리 보다는 멀리

빨리 가려면 혼자 가고, 멀리 가려면 함께 가라!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자주 인용되는 아프리카 속담이다. 국제 공조의 필요성을 강조하려는 것이겠지만, 단기 성과 추구에 대한 경계로도 어울리는 말이다.

회사채는 효율보다는 안정을 추구하는 금융상품이다. 빨리 그리고 싸게 자금을 조달하는 수단이 아니라 오랜 기간 자금을 쓸 수 있는, 멀리 함께 가는 금융상품이다. 그런 회사채 시장이 요즘 뒤숭숭하다. 멀리는 사라지고 빨리만 범람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사채 발행잔액은 1년 사이에 50% 가까이 늘었다. 금융위기의 반사 효과를 톡톡히 누린 것이다. 위기의 긴박감이 잦아든 6월 이후에는 증가추세가 눈에 띄게 완화되었지만, 어쨌든 1년 넘게 순발행 추세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시장 내부를 살펴보면 상황이 썩 좋지 않다. 신용 등급간의 극단적 양극화와 전반적인 만기축소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서마저 멀리가 아니라 빨리가 대세다.

자본시장통합법 이후 기업금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증권사마다 조직을 정비하고 긴 레이스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그에 따른 기업금융 시장의 진화는 아직 보이지 않는다. 대신 당장의 리그 테이블 순위를 좌우하는 외형 경쟁만 가열되고 있다. 주식시장과 달리 리그 테이블이 대형 투자기관이 아닌 언론의 영역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투자자의 관심을 반영한 질적 평가보다는 언론의 성격상 객관화가 가능한 양적 평가에 치중한 결과다.

회사채 시장 활성화에 대한 논의 자체가 미미한 상황에서 요즘 들어 부쩍 은행에게 회사채 인수업무를 허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은행이 인수업무를 수행하면 회사채 발행이 훨씬 원활해질 것이라는 논리다. 산업은행의 성격 변화와 관련이 있어 보이지만, 단기 성과를 위해서는 직간접 금융의 분리라는 기본 원리조차 포기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너무 위험해 보인다.

◇ 뚜벅뚜벅 가는 길

회사채 시장 활성화에 대해 논의할 때마다 듣는 이야기가 있다. 똑같은 이야기를 벌써 몇 년째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이해할 수 있는 반응이다. 그간의 성과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좀처럼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통상적인 인식과는 달리 기업자금 수요와 회사채 발행은 그다지 유의한 상관관계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은행 여신이라는 대형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2005년 이후 수년간 대대적인 기업자금 수요 확대에도 불구하고 회사채 시장이 횡보한 이유는 바로 은행이 대출과 사모사채로 기업자금 수요 증가의 대부분을 쓸어갔기 때문이다. 반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은행의 자금공급이 중단되면서 회사채 발행이 급증했었다.

이처럼 회사채 시장의 위상은 은행과의 관계설정에서 그 기본 틀이 결정된다. 고도성장과 관치금융 그리고 은행은 어울리는 조합이다. 반면 회사채와 어울리는 조합은 개방, 자율, 안정성장 등의 개념이다. 경제가 성장하고 경제 규모가 확대되면서 기업자금 수요 기반이 은행에서 회사채로 이동하는 것은 상식이다.

하지만 그런 천이에는 상당한 시행착오와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은행은 나름대로 가는 손님을 붙잡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회사채 시장은 새 손님 맞을 준비를 하면서 조금씩 천이가 진행된다. 그러다가 금융위기 같은 계기를 만나면 천이가 뭉텅이로 진행된다. 그래도 서둘러서 될 일이 아니다. 회사채 시장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외환위기로 급성장했다가 대우와 현대 사태를 겪으며 급격히 무너졌던 지난 2000년 전후의 상황이 재현될 수 있다.

신용시장의 맏형인 은행의 넘치는 의욕을 잘 조율해야 한다. 그래야 2005년 산업은행의 회사채 싹쓸이, 2006년의 은행 사모사채 급증, 2008년의 외화유동성 대란과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주식시장에 비해 한참 뒤진 펀드의 공모화, 대형화, 장기화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포트폴리오와 리그 테이블, 트랙 레코드, 부실채권의 합리적 처리 등 정비해야 할 것이 수없이 많다.

그 뿐 아니다. 신용평가와 시가평가 등 회사채 시장의 인프라도 꾸준히 업그레이드해야 한다. 신용평가가 단순히 신용등급만 움직이는 시대가 아니다. 끊임없는 환경 변화를 읽어 가이드라인을 가다듬고 새로운 리스크 요인을 걸러내는 시장의 레이더가 되어야 한다.

더불어 회사채 시장에 대한 학문적 접근도 촉진해야 한다. 회사채 시장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는 학자가 과연 몇 명이나 될까? 학계의 시장 연구는 정책의 방향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회사채 시장이 자꾸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겉도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전반적으로 당국의 몫이 적지않은 과제지만 시장이 먼저 스스로 기반을 닦는 노력이 필요하다. 과연 우리는 먼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칼럼니스트 소개]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 약력

2001∼ 신한금융투자 선임연구위원

1988∼2001 한국신용정보, 연구개발실장 화학산업평가실장

KAIST MBA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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