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bell

전체기사

[이현중의 Prism]과함과 모자람

이현중 기자공개 2014-12-04 08:58:39

이 기사는 2014년 12월 03일 14:51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중용(中庸)을 강조한 언표인 과유불급(過猶不及)은 과유와 불급을 같은 정도로 평가하지만 사상 의학은 넘침을 주의하라 한다. 몸의 병은 조화가 어그러져 나타난 현상으로 태과(太過, 강하거나 지나침)와 불급(不及, 미치지 못함)은 부조화의 예다. 이 가운데 태과가 더 해롭다고 설명한다. 남아서 넘쳐나는 것보다 다소 모자란 것이 좋다는 뜻이다.

불행의 원인은 모자람에 있지 않다. 오히려 넘침이 모든 불만의 씨앗이다. 모자람은 채워지면 고마움과 만족을 일깨우지만 넘침은 충족에서 오는 행복감을 마비시킨다.

계영배(戒盈杯)라는 잔이 있다. 밑에 구멍이 뚫려 있지만 물이나 술을 부어도 처음에는 전혀 밑으로 새지 않는다. 그러다 잔의 7할 이상이 채워지면 모두 밑으로 흘러내린다. 조선시대 거상 임상옥을 다룬 소설 '상도'에 나오는 이 잔 또한 가득함과 넘침을 경계하고 있다.

절대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목표는 단 하나였다. '성장'이다. 부와 명예, 그리고 지위. 누구나 노력만 하면 손에 쥘 수 있는 성공의 징표들이다. 고도성장의 시대에는 쓰러지지만 않으면 원했던 것을 쥘 수 있었다. 간혹 재수가 없어, 또는 경기흐름을 잘 못 예상해 벌렸던 사업을 접더라도 다음 번 기회를 노릴 수 있었다. 패자 부활전이 가능했던 시대였다. 굳은 의지로 끝까지 매달려 포기하지 않으면 된다.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가 삶의 모토다.

오지 않은 미래는 불확실성 자체다. 그래서 불안하다. 성장의 시대에 불안은 불안을 일으키는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려는 의욕을 키운다. 미래는 지금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진보의 충동이다. 내일은 유토피아다. 오늘의 현실은 부정하고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다. 성장은 '신화'로 배치된다. 신화는 현실의 영웅을 만들고 정주영과 김우중은 우리가 살아온 성장 시대의 아이콘이다.

남들과 반대로 행동해서 큰 성공을 서둔 사람의 얘기도 흔했다. 역발상은 무모하리라 생각됐던 도전이 터뜨린 잭팟을 그럴싸하게 만드는 논리다. 시대와 맞서 기회를 잡은 승자의 스토리는 무용담을 넘어 누구나 따라야 할 전범(典範)으로 탈바꿈 한다.

성장의 스토리가 더 이상 먹혀 들지 않는 시대가 왔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오르는 것이 불가능한 시절이 됐다는 얘기다. 장기간 이어진 과잉소비와 과잉 투자의 결과다. 석유를 둘러싼 정치학의 영향도 무시할 수 없지만 최근의 유가 급락은 그동안 고유가를 지탱했던 수요가 거품에 기반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현상이다. 금융위기 이전에 누렸던 경기 호황은 이제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 글로벌 불균형과 소득분배의 변화, 구조적으로 부진했던 투자 문제가 위기 이전 부풀려진 수요의 이면에 도사린 문제다.

불안은 나만 느끼기도 하지만 타자들도 도가니 속에 갖힌 듯 옴짝 달싹 못할 때가 있다. 남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지만 나만 어찌할 바를 모른다면 불안의 주관적 체험이지만 보통 사람의 보편 정서로서 불안은 시대정서로 사회현상이다. 지금은 앞으로 가야할 방향을 의미하는 시대정신은 좀처럼 찾기 힘든 반면 과함의 후유증인 '저성장'이라는 시대정서의 다양한 징후들이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예금금리 1% 시대가 단기간에 끝날 성질은 아닌 듯하다.
< 저작권자 ⓒ 자본시장 미디어 'thebell',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관련기사

이현중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더벨 서비스 문의

02-724-4102

유료 서비스 안내
주)더벨 주소서울시 종로구 청계천로 41 영풍빌딩 5층, 6층대표/발행인성화용 편집인이진우 등록번호서울아00483
등록년월일2007.12.27 / 제호 : 더벨(thebell) 발행년월일2007.12.30청소년보호관리책임자김용관
문의TEL : 02-724-4100 / FAX : 02-724-4109서비스 문의 및 PC 초기화TEL : 02-724-4102기술 및 장애문의TEL : 02-724-4159

더벨의 모든 기사(콘텐트)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으며, 무단 전재 및 복사와 배포 등을 금지합니다.

copyright ⓒ thebell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