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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MM 인수자의 '또 다른' 조건 [thebell note]

허인혜 기자공개 2023-02-01 07:50:48

이 기사는 2023년 01월 31일 07:52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팔리는 자에게 새 주인의 조건을 물으면 답은 다양하다. 혹자는 비싸게 사줄 곳을, 혹자는 대감집을, 혹자는 딸린 식구를 다 품어줄 이를 원한다. 기왕지사 팔리는 입장에서는 경제적 요구조건을 모두 들어주는 곳이라면 베스트다.

그런데 매각을 앞둔 HMM의 대표가 내놨던 대답이 생각과 좀 달랐다. 김경배 대표는 인수자에 대한 바람으로 "정체성을 잘 살려줄 수 있는 곳이었으면 한다"고 했다. 행사 중간 짬을 낸 질문과 대답이었기에 당시에는 다음 질의를 생각하는 데만 머릿속이 바빴는데, 돌아서고 보니 정체성이라는 말을 곱씹는다.

김 대표는 왜 다른 답지 대신 '정체성'을 골라 내밀었을까. HMM의 매각을 두고 설왕설래는 많지만 보통의 주제는 경제성이다. 운임이 하락해 HMM의 가치가 떨어지고 있다, 매각 시기를 놓쳤다, 예상가가 너무 높다 등 값어치를 두고 여러 곳에서 말이 많다.

사실 M&A에서 매각가가 가장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다. 이 와중에 HMM의 정체성을 논하는 것은 너무 낭만주의적인 접근일까. 하지만 몸값, 그러니까 본체의 값을 따질 때 기업의 진짜 가치와 정체성을 생각해보는 건 또 한편으론 퍽 경제적인 사고다.

HMM의 시초는 1976년 출범한 아세아상선이다. 현대조선에 유조선을 발주했던 선주들이 석유파동으로 인수를 포기했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공중에 떠 버린 배 세 척을 사들이며 출항했다. 시작은 위기에서 왔지만 장사가 잘됐고 우리 제품을 우리 배로 실어 수출한다는 의미도 깊었다. 매출액이며 항로 개척 등에서 업계 최초 타이틀을 여럿 달았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시작된 경영난이 오래 발목을 잡았다. 산업은행 산하에 속한 햇수도 8년차다. 호황기가 오기 전까지 매년 적자를 봤다. 다시 실적 엔진을 켠 해가 2020년이다. 오랜 난파 위기를 견디면서도 살을 깎을지언정 배는 늘 띄웠다. 견딘 세월이 길었으니 '해운사의 정체성을 잘 살려달라'는 요청도 당연하다.

인수자의 조건으로 정체성을 이야기하는 건 달라진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하다. 개혁할 새 주인을 찾기보다 지금의 색을 이어갈 수 있는 곳을 환영한다는 의미라서다. 해운업 전망이 밝지 못한 상황에서도 HMM의 표정은 전과 달라졌다.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장사를 잘한 덕에 투자계획도 현금도 충분히 비축했기 때문이다.

HMM의 매각에는 해운산업의 미래도 달려있다. 조승환 해수부 장관의 '국적선사로서 해운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제일 좋은 주인을 찾아주는 민영화'나 김 대표의 '정체성을 지켜줄 주인'이라는 말은 단순한 기업이 아니라 국내 해운산업의 대표주자라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이런 맥락을 짚어본다면 경제적 조건보다 정체성을 먼저 언급한 김 대표의 말이 퍽 이해가 간다. 군불을 오래 뗀 만큼 이왕이면 HMM의 바닷길을 더 넓혀줄 매수자가 새 주인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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