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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팹리스 육성 적기, 핵심은 '민간 주도·효율성 극대화'" [반도체 정책 길을 묻다]④'모바일AP 전문가' 삼성전자 임원 출신 성균관대 김용석 교수

김혜란 기자공개 2022-06-02 12:56:42

[편집자주]

전세계적으로 반도체 국가주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산업에 대한 정부·정치권의 '패러다임 시프트'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그간 소극적 지원에 그쳤다면 획기적인 인재양성책, 세제혜택, 규제완화 기조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업계가 가장 절실하고 시급하게 요구하는 것은 무엇이고 정부의 정책입안과 국회의 입법 지원은 어떤 식으로 이뤄져야 할까. 산업계와 행정, 입법부, 학계의 목소리를 듣고 대책을 모색해 본다.

이 기사는 2022년 05월 31일 08:1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윤석열 정부의 '반도체 초강국 건설' 그림은 메모리 반도체에서부터 팹리스(설계전문), 파운드리(위탁생산)까지 세 분야가 고르게 도약할 때 완성된다. 이 중에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가장 공들여 키워야 할 분야를 꼽는다면 팹리스 산업이다. 팹리스는 4차산업을 지탱하는 시스템 반도체 기술의 뿌리이나 국내 반도체 생태계에서 유독 취약한 고리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2000년대 중후반부터 육성책을 쏟아냈으나 팹리스 업계는 늘 '제자리걸음'이었다. 토종 팹리스를 다 합쳐봐야 세계 시장점유율이 1%대에 불과하고, 그나마도 적자기업이 수두룩하다.

반도체 업계에선 4차산업 고도화가 시작되며 세상에 없던 시스템 반도체가 개발되는 지금이야말로 토종 팹리스가 성장할 적기라고 지적한다. 정부의 지원책은 과거와 어떻게 달라져야 할까.

삼성전자 상무 출신으로 성균관대학교로 옮겨 9년째 반도체 인재 양성에 힘쓰고 있는 김용석 성균관대 전자전기공학부 교수(사진)를 만나 의견을 들어봤다. 그는 삼성전자에서 31년간 시스템 반도체, 모바일 분야 엔지니어로 일했다.

김 교수는 "반도체 산업을 육성하겠다고 정부 간섭이 많아지면 효율성이 저해될 수 있다"며 "민간이 주도하게 판을 깔아주는 게 정부의 역할"이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다만 현재 정부지원 연구·개발(R&D) 시스템을 '스타 팹리스'를 키우는 방향으로 획기적으로 개선하고, 정부출연연구기관의 중소 ·벤처 팹리스 지원 역할이 커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와의 인터뷰는 수원 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반도체관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중소 팹리스 양성이 최대 과제, 정부 R&D 시스템 개편해야

4차산업 시대를 떠받치는 핵심 기술은 인공지능(AI)과 사물인터넷(IoT)이다. AI와 IoT 기반의 자율주행과 스마트 팩토리, 스마트 헬스케어 등을 실제로 구현하려면 세상에 없던 새로운 반도체가 개발돼야 한다.

김 교수는 "AI와 IoT 기술에서 가지 친 제품과 그 제품들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시스템 반도체들이 세상에 쏟아져 나올 텐데 처음엔 물량이 적고 특정 용도의 칩들이 많을 것"이라며 "이런 칩 개발을 대기업이 다 할 수는 없으니 중소 팹리스들이 커버해줄 수 있다. 국내에서 성공 모델을 만든 뒤 글로벌 시장으로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럼 국내 팹리스 생태계는 얼마나 준비가 됐을까. 중소기업벤처부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국내 팹리스는 150개에 달한다. 그러나 삼성전자와 LX세미콘 등 대기업을 제외하고 매출이 1000억원을 넘고 흑자를 내는 곳은 텔레칩스와 에이디테크놀로지, 어보브반도체, 제주반도체 외에는 찾기가 어렵다.

삼성전자 팹리스(시스템LSI 사업부)의 글로벌 경쟁력도 5위로 밀려난 상태다(카운터포인트리서치 조사, 작년 4분기 기준). 대만 미디어텍에 아시아 팹리스 1위 자리를 내준 건 뼈아픈 일이다. 김 교수는 이처럼 한국이 '팹리스 불모지'가 된 것은 중소팹리스들이 만성적인 인력 부족에 시달린 데다 수요처(고객) 확보에도 실패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정부가 팹리스를 지원한다고 인력과 일감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줄 수는 없다. 김 교수는 "정부는 예산으로 국책과제(정부지원 R&D 사업)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고, 선정된 프로젝트가 상용화까지 진행되게끔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인재 양성과 기술 경쟁력 강화, 수요자 연계 등의 과제는 기업과 학교가 각각 알아서, 주체적으로 해야 할 일이라는 설명이다.

정부는 국책과제를 수행할 팹리스를 선정해 개발비를 지원하고 있으나 '나눠주기식'으로 운영됐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많다. 최종 제품을 만드는 대기업이 필요로 하는 반도체를 개발하기 위해선 사업화가 가능한 국책과제를 선정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정부 예산의 도움 없이는 생존이 어려운 한계기업을 지원하는 데 중점을 두다 보니 상용화 가능성이나 개발 난이도가 낮은 과제가 남발되고 있다는 지적이 일각에서 나온다. 김 교수는 "정부가 옥석 가리기를 해서 될 만한 곳 위주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무엇보다 기업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하도록 실패를 용인하는 게 중요하다. 연구 과제의 성공률을 따지는 건 큰 의미가 없다. 김 교수는 "새로운 시스템 반도체 개발에 나설 때 100% 상용화를 장담하며 시작할 수는 없는데 규모가 작은 기업에는 도전 자체가 기업의 운명을 걸어야 하는 큰 리스크가 된다"며 "정부 예산을 지원하고 '실패해도 괜찮으니 도전하라'고 권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정부출연연구기관 역할론도 제시했다. 김 교수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 한국전자기술연구원(KETI)이 중소기업을 도와야 한다"며 "이들 연구기관 전체 인력 중 30%만 연구소에서 차세대 기술을 연구하고 70% 정도는 중소기업에 파견을 가서라도 직접적인 도움을 줘야 한다"고 설명했다.

◇기업도 대학도, 인재양성 시스템 대전환 필요하다

시스템 반도체 설계 역량 강화는 대기업인 삼성전자에도 과제다.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가 중심을 잘 잡아야 중소형 팹리스와의 설계자산(IP) 외주 협력 등을 통한 생태계 동반성장 그림을 그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정부가 지원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고 삼성전자가 고민해야 할 문제라는 게 김 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내부 인재 양성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 교수는 최근 삼성전자가 겪은 'GOS 논란'도 시스템LSI 사업부 내에 전체 큰 그림을 그리는 엔지니어가 부족한 탓에 빚어진 일이라고 진단했다. 김 교수는 삼성전자에서 시스템소프트웨어 팀장을 맡아 갤럭시S1(2010년 삼성전자가 처음 개발한 스마트폰)에서 S4까지 스마트폰 개발을 주도했던 전문가다.

김 교수는 "과거 피처폰에선 모뎀칩이 전화 통화만 잘 되게 하면 됐다"며 "스마트폰은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가 핵심 역할을 하며 여러 응용 서비스를 탑재하기 때문에 AP의 고성능, 저전력(Low power) 설계 역량이 매우 중요해졌다"고 말했다.

AP를 설계한다는 건 마치 신도시를 세우는 것처럼 매우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다. 신도시(AP)에는 관공서, 아파트 등 많은 건물(반도체 칩)을 다 넣어야 한다. 그리고 건물을 서로 잇기 위해 도로를 내야 한다. 2차선 도로를 만들지, 8차선 도로를 낼지는 전체 도시의 차량 흐름을 정확하게 예측해 결정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비효율적으로 도로를 내 정체 등의 문제를 만든다.
삼성전자 스마트폰 초기모델인 갤럭시S1과 S2(오른쪽)

삼성전자가 내부에 이런 설계(아키텍처)도를 짜는 '시스템 아키텍트'(Architect·아키텍처를 만드는 사람)를 충분히 양성하지 못한 탓에 고성능화된 AP의 발열을 잡지 못했다는 게 김 교수의 분석이다. 그는 "시스템 아키텍트는 칩을 어디에 배치할지, 칩 간 어떻게 연결해야 가장 효율적일지 방향을 설정하는 역할을 한다"며 "이 역량이 있어야 데이터 처리 속도를 올리되 전류소모를 줄인 칩을 만들 수 있다"고 부연했다. AP에 들어가는 각각 반도체 칩 설계 역량을 키우는 것만큼이나 전체 숲을 기획할 수 있는 전문가를 키우는 게 중요하단 설명이다.

대학도 이에 맞춰 실무 위주로 교육과정을 개편할 필요가 있다. 김 교수는 "'반도체 계약학과'를 6년(학사 4년+석사2년) 과정으로 늘리고, 수업을 프로젝트 중심으로 바꾸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를 위해선 반도체 설계·공정 실무를 경험한 기업 출신 교수진이 많아져야 한다.

김 교수는 "정부는 반도체 기업 출신 인사가 반도체 정책 관련 행정기관에서 '브레인' 역할을 하도록 등용해야 한다"며 "기술의 큰 흐름이 바뀔 때 기회를 잡아야 하는데 4차산업이 시작되는 지금 시작하지 않으면 기회를 놓친다. 앞으로 5년이 가장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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