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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물 시장의 '포르투나' [thebell note]

김지원 기자공개 2022-05-02 07:11:54

이 기사는 2022년 04월 28일 07:45 더벨 유료페이지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운이 안 좋았죠."

최근 한국물 딜이 끝날 때마다 발행사와 주관사들이 빠짐없이 꺼내는 말이다. 미국 연준이 하루가 멀다하고 쏟아내는 기준금리 인상 발언들과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상황을 감안하면 충분히 이해 가능한 발언이다.

동일 등급, 동일 업종의 발행사라도 프라이싱 시기의 미세한 차이에 따라 딜의 성패가 갈라지는 실정이다. 연준이 빅 스텝을 넘어 자이언트 스텝을 단행할 거란 전망까지 나오자 IB들도 시장 상황을 섣불리 예측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기획재정부가 부여한 윈도우(Window)라는 제한된 시일 내에 발행을 마쳐야 하는 기업들 입장에서는 속이 탈 수밖에 없다. 프라이싱 당일 급작스러운 변수가 발생하지 않기만을 바라야 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지난주 한국물 시장을 찾은 미래에셋증권은 미국 연은의 75bp 인상 발언과 러시아의 돈바스 지역 공격이라는 겹악재 탓에 FPG(최종제시금리) 발표 이후 달러채 발행을 급히 철회했다. 금주 프라이싱에 나설 계획이었던 KB국민카드도 끝내 발행 일정을 연기했다. 사유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시장 여건 악화로 인한 변동성 확대다.

작금의 상황은 꿈에도 몰랐을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서 '군주론'에서 운명의 지배에 기대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따끔한 충고를 건넸다. "운명이란 우리의 행동에 대해서 반만 주재할 뿐이며 대략 나머지 반은 우리의 통제에 맡겨져 있다."

운명(Fortuna)의 힘은 각 나라가 얼마나 많은 역량(Virtù)을 갖추고 있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자금을 무사히 조달하기 위해 맨 앞에서 딜을 진두지휘해야 하는 실무진을 군주에 조심스레 빗대보자면 과연 한국물 시장에서의 비르투는 무엇인지에 대한 궁금증이 남는다.

나라를 다스리는 군주론에 왕도가 없듯 한국물 시장에도 완벽한 정답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딜을 둘러싼 상황이 어려울 때일수록 비르투에 더 큰 무게가 실린다는 건 분명하다. 금리를 양보하고 발행을 강행할지, 윈도우를 다시 받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감수하고 발행을 연기할지 결정하는 건 전적으로 당사의 몫이자 역량이다.

미래에셋증권이 아쉽게 다음을 기약한 건 결코 운이 나빠서만은 아닐 것이다. 발행사가 SLB(지속가능연계채권) 준비 작업까지 마치고 프라이싱 전 5년물을 급하게 드롭한 데 이어 FPG까지 평소보다 높게 제시하는 것을 본 투자자들은 딜의 결말을 일찌감치 예견하고 주문을 거뒀을 거라 조심스럽게 추측해볼 수 있다.

시장에 나가기만 하면 목표액의 몇 배에 달하는 금액을 거뜬히 모으던 호시절은 지났다는 게 최근 만난 IB들의 중론이다. 포르투나의 중요성을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으나 결국 비르투의 손을 들어줬던 마키아벨리의 오랜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한국물 발행사들이 최선의 비르투를 발휘해 최고의 포르투나를 만들어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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