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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라자드 하우스의 역사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18-10-01 08:52:09

이 기사는 2018년 09월 17일 10: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라자드(Lazard Freres)는 1970년대에 M&A 자문업무가 IB의 독립적인 수입원이 되는 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IB들은 1970년대가 되기 전까지는 지금과는 반대로 M&A 업무를 증권인수업무를 위한 무상 서비스로 여기는 경향이 있었다. M&A 자문업무는 주식이나 회사채 인수업무를 만들어낼 수 있는 통로 역할로만 인식되었다.

라자드는 19세기 후반에 프랑스 이민이었던 라자드 삼형제가 뉴욕, 런던, 파리에 각각 머천트뱅크를 설립하면서 출발했다. 그런데 세 형제 모두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조카의 아들이었던 D데이비드-웨일(David DavidWeill)이 가업을 승계했다.

파리의 은행은 성공적이었던 반면 뉴욕의 은행은 평범한 회사채 인수 전문 은행이었다. 1943년에 D데이비드웨일의 뒤를 이어 은행을 경영하던 P데이비드-웨일(Pierre David Weill)은 히틀러의 압제를 피해 망명한 앙드레 메이어(Andre Meyer)에게 뉴욕의 은행을 맡긴다. 이 결정이 회사의 역사를 바꾸었다. 메이어는 소매증권업무와 회사채 인수업무를 과감히 축소, 폐지하고 M&A 업무에만 전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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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어는 라자드 하우스를 월스트리트 최강의 M&A 자문 펌으로 발전시켰다. 그래서 1968년에는 서구 최고의 투자은행가라는 명성도 얻었다. 메이어는 IB 업무 중에서 M&A가 가장 적은 자본으로 고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일찌감치 간파했었다. 메이어와 그 뒤를 이어받은 오스트리아계 이민 출신 로하틴(Felix Rohatyn)은 M&A 시장을 사실상 창조했다고까지 일컬어진다.

로하틴은 메이어의 섬머인턴으로 출발했던 사람이다. 유대인인 로하틴은 프랑스에 살다가 나치를 피해 구사일생으로 마르세이유를 거쳐 카사블랑카로 탈출했다. 그 많은 재산 중 치약 튜브 안에 들어가는 다이아몬드 밖에는 가지고 나올 수 없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아무도 뺏을 수 없고 어디든 가지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지식이라면서 면학에 힘썼다. 리스본과 리오데자네이로를 거쳐 천신만고 끝에 1942년 미국에 들어왔다. 나중에 로하틴은 서독에서 미군 상사로 복무한다.

로하틴은 1960년대 후반부터 라자드를 대표하는 M&A 전문가로 명성을 쌓았다. 로하틴은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다시 M&A 붐이 일어나자 업계의 원로로 활약했으며 오랫동안 재무장관 후보로 거론되다가 1997년에 프랑스 대사가 되어서 업계에서 은퇴했다. 1999년에 오마하 비치에서 열린 D-데이 55주년 기념행사에서 참전 용사들에게 연설을 하기도 했다.

라자드는 2000년에 M데이비드-웨일(Michel David-Weil)의 주도로 뉴욕, 런던, 파리 세 펌을 하나로 통합해서 오늘날의 라자드가 되었다. 그러나 2002년에 M&A 업계의 대표적인 컨설턴트였던 고 와써스틴(Bruce Wasserstein)을 회장으로 맞으면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와써스틴은 2005년에 라자드의 뉴욕증권거래소 IPO를 성사시켰다.

라자드는 전통적으로 가족기업의 속성을 유지했고 소수 엘리트들이 운영하는 펌이었기 때문에 공개를 고려하지 않았고 1999년에 골드만삭스가 기업을 공개한 후 월스트리트 주력 하우스들 중 유일하게 비공개로 남아 있었다.

와써스틴은 라자드에 합류한 후 일종의 내전을 촉발시켰다. 와써스틴은 회사의 지배구조와 보수체계를 개편해서 회사를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시도했다. 취임 첫 2년 동안 59명의 새 파트너를 영입했다. 회사는 성장하고 수익도 급증했으나 파트너들에게는 배당을 지급하지 않았다. 소유구조가 데이비드-웨일을 중심으로 한 가족 구성원들의 36%와 와써스틴을 중심으로 한 파트너들의 64%로 나누어졌고 후자만 IPO에 찬성했다.

우여곡절 끝에 조건부 기업공개 결정이 내려졌고 골드만삭스를 주관사로 주당 25달러에 IPO가 단행되었다. 여기서 6,250만개의 의결권을 갖는 주식이 한 주 발행된 것으로 유명하다. 브로커-딜러 부문은 IPO 때 독립시켰다. 그러나 라자드의 IPO는 실패로 드러나 총액인수를 한 골드만삭스는 손실을 입었고 라자드와 골드만은 승소하기는 했지만 집단소송도 당했다.

라자드의 새 역사를 열었던 와써스틴은 2009년에 심장마비로 갑자기 사망했다. 와써스틴은 하버드 로스쿨과 경영대학을 복수전공으로 동시에 졸업한 수재였다. 미국 최고의 로펌이라는 크라바스에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퍼스트 보스턴으로 이동해서 결국 M&A 부문 공동대표가 된다. 1988년에 역시 M&A 업계의 전설적 인물 조셉 피렐라(Joseph Perella)와 동업으로 부띠크를 차렸다. 와써스틴은 2000년에 이 회사를 독일의 드레스드너은행에 14억 달러를 받고 매각했다. 와써스틴은 적대적 M&A 방어수단인 ‘팩-맨'(역공)을 처음 고안한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하버드 로스쿨에 2,500만 달러를 기부해서 지금 학교에 그 이름이 붙은 첨단 건물이 서 있다.

로하틴은 파생금융상품을 스물 여섯 살 짜리 MBA가 PC로 만든 ‘금융 수소폭탄'이라고 부르며 싫어했었다. 라자드는 M&A 업무에 전념했기 때문에 당연히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큰 타격을 받지 않았다. 라자드는 M&A에 특화되어 있어서 리그테이블 10위 안에 드는 대형 IB지만 항상 부띠끄라고 불리는 특이한 하우스다. 금융위기 후에 파이낸셜 타임즈는 "라자드는 골드만 삭스가 될 수도 있었지만 리먼 브라더즈가 될 수도 있었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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