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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파고스에서 생긴 일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공개 2010-01-12 11:44:30

[편집자주]

자본시장 발전에 신용평가는 인프라와 같은 존재입니다. 서브프라임사태로 신용평가의 공정성이 도마위에 오르고 있는 것도 신용평가의 중요성을 재차 일깨우는 사건입니다. 더벨은 신용평가를 포함해 크레딧시장의 전반을 전문가의 날카로운 시각을 통해 분석합니다. 신용이슈 등 일련의 현상에 대해 폭넓은 이해의 기회가 될 것입니다.

이 기사는 2010년 01월 12일 11:44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조용한 연말을 금호 워크아웃 소식이 뒤흔들었다. 올게 왔다는 한탄과 과연 이 길밖에 없었나하는 아쉬움이 함께 밀려왔다. 그러나 그저 한탄과 아쉬움, 또는 누군가에 대한 비난으로 넘어가기에는 수업료가 너무 비싸다. 위기에서 작은 교훈이라도 건져보자.

◇ 금호의 마이웨이

2008년 8월 하순 금호 그룹의 마지막 크레딧 IR이 있었다. 비공개 IR이었지만 준비는 충실했다. 자료는 90페이지가 넘었고 설명은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2시간 반에 걸친 열띤 IR의 뒷맛은 그다지 개운하지 않았다.

금호 이슈의 골자는 대형 M&A에 따른 재무적 부담이었지만 트리거는 대우건설 주가하락에 따른 풋옵션 부담 확대였다. 주가가 하락한 이유는 복합적이다. 부채증가, 건설PF 등 내부요인과 글로벌 금융위기의 진행에 따른 시황 변화 등 외부요인이 상호 작용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도 화살은 소위 불순세력의 공매도로 돌려졌다. 실제로 그런 움직임이 있었을 개연성은 충분했고,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분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너무 민감하게 반응하여 심지어 국가안보를 다루는 기관까지 거론되는 상황은 적잖이 난감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런 ‘남의 탓’이 투기의 빌미를 제공한 ‘내 탓’에 대한 성찰을 방해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었다.

초점은 곧장 자구노력을 통한 유동성 확보 방안으로 옮겨갔다. 산술적으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제시된 내역은 그리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당연히 시장에 관심이 있는 ‘견적이 나오고, 매력 있는 물건’의 매각 의지를 묻는 질문이 나왔다. 답변은 유보적이었다. 그냥 일방적으로 믿어달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몇 건의 자산매각으로 유동성을 확보했지만 시장의 우려를 덜기에는 크게 부족했다. 시간이 늘어지고, 가격은 떨어지면서 결국 유보적이던 자산들도 매각 리스트에 올랐다. 그래도 역시 진전은 더뎠다. 글로벌 금융위기의 본격화로 시황이 나쁜 탓도 있겠지만, 두산 등 다른 그룹이 적극적인 자산매각으로 유동성을 확보하는 나름의 성과를 올린 것과 비교가 되었다. 뭔가 그들만의 생각, 믿는 구석이 있어 보였다.

드디어 최대 채권자인 산업은행이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리고 대우건설 포기를 종용하는 언급이 갈수록 커졌다. 화근부터 자르는 상식적 접근이지만, 구조조정의 또 다른 상식은 견적이 나오고, 매력 있는 물건부터 정리하는 것이다. 쌍용건설의 사례에서 보듯이 이런 상황에서 대형건설사의 매각은 절대로 쉽지 않다. 과연 구조조정의 마스터 플랜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그저 상황 따라, 말씀 따라 흘러가는 것일까?

◇ 구조조정 정책의 강고함

당국의 구조조정 정책을 평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기검열의 부담도 있지만, 그보다는 딱 떨어지는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각종 정보와 논리, 그리고 결론과 영향까지 모두가 불확실하고 불명료한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따져보면 정책의 방향에 따른 상대적 수혜와 피해가 있기 마련이다.

작금의 구조조정 정책을 외환위기 때와 비교해 보면 큰 틀은 유사하지만 몇 가지 작은 차이가 보인다. 그 하나가 강력한 내부 통제다. 외부 자문과 외부 인력, 방법론의 이견이 거의 없고 각종 정보의 흐름이 완벽하게 장악되고 있다. 한마디로 업무진행이 일사불란하다. 그래서 또 불안한 것이 현실이다. 워낙 구조조정은 정답이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금융위기 이후의 기업 구조조정은 통상, ‘당국-기획, 은행-주연’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물론 기업신용 가운데 은행의 비중이 절대적으로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금융시장에는 조연의 비중도 적지 않고, 조연의 이해관계는 아무래도 연출자 하기 나름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연출자가 보이지 않는다.

결국 은행이 주도하는 재무구조 개선은 은행 신용이 상당 부분 자본시장의 리테일 투자로 대체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심지어 은행들이 워크아웃을 준비하는 한편에서 회사채와 CP가 대규모로 발행되었다. 국가신용도와 직결되는 은행의 손실은 어쨌든 줄었지만 리테일 투자자들은 봉변을 당했다. 물론 탐욕의 대가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 배경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크다. 전형적인 정보의 비대칭에 따른 역선택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연출의 부재는 금호 등 구조조정 기업의 자구노력이 어정쩡하게 진행된 또 하나의 배경이 되었다. 정책의지 자체가 다분히 곡해될 여지가 컸고, 그것이 분명해졌을 때는 이미 상황이 훨씬 어려워진 후였다. 더욱이 기업의 연명을 도왔던 리테일 투자는 워크아웃이 본격화되면서 이제 만만치 않은 걸림돌이 되었다. 결국 구조조정 비용은 커졌다.

왜 당국은 외환위기 때와 달리 기획에만 머물고 구조조정 전면에 연출자로 나서지는 않을까? 그 사이 은행들의 역량이 커졌고 상대적으로 구조조정의 압박이 작은 것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관치금융 논란에 휘말리지 않으려는 신중함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앞서 적은 글을 뒤집어 읽어보자. 강력한 내부 통제의 필연이다. 요즘처럼 복잡한 세상에서 메가폰을 잡는 연출자는 일사불란하게 조직을 이끄는 카리스마 못지않게 능소능대하게 상황에 대처하는 유연성을 갖춰야 한다. 필수적으로 외부 자문, 외부 인력, 방법론의 이견, 정보 교류를 수용해야 한다. 그러고 보면 1998년 당시의 구조조정위원회는 전형적인 외인구단이었다.

◇ 신용평가의 순혈주의

BBB등급의 신용 이벤트는 A등급의 신용 이벤트와 양상이 다르다. 보다 우월한 입장에서 자료를 더 충실히 제공받기 때문에 적어도 평가사가 눈뜨고 당하는 부실은 없다. 빤히 패를 보면서도 타이밍 조절에 실패한 것이다. 우리 평가사의 문제점은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시장의 고통에 제대로 공명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입장에 갇히다 보니 번번이 뒷북을 친다.

글로벌 평가사와 달리 우리나라 평가사에는 10년 이상 장기근속하고 있는 인력이 수두룩하다. 반면 금융시장 경력자를 채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구성원의 장기근속은 좋은 일이지만 순혈주의는 시장과의 소통에 부정적이다. 외부와 단절된 채 독자적 발전을 추구하다가 시장의 큰 흐름에서 소외되는 소위 ‘갈라파고스 현상’에서 좀처럼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외부인력의 유입이 없으면 평가지식의 전수도 도제식 교육으로 충분해서 자연스럽게 지식의 매뉴얼화가 뒷전으로 밀린다. 사실 전문지식은 상당부분 암묵적 지식이어서 매뉴얼화도 어렵고 굳이 하자면 많은 무리가 따른다. 하지만 매뉴얼은 나름의 장점이 있다. 환경변화에 따른 논리의 변화를 구체화하기 쉬워 오류를 반복할 가능성이 줄어든다. 반대로 암묵적 지식에만 의존하다 보면 자칫 시장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게 된다.

금호의 사례에서 보듯이 평가사들이 도무지 시장의 정서를 읽지 못하고 있다. 회사채 시장에서 가장 잘못된 신용등급이라는 지적이 오랜 기간 이어져도 그저 모르쇠로 일관한다. 신용등급 결정이 평가사의 고유영역이라는 것은 명명백백하지만 시장의 문제제기를 매양 무시하는 것까지 합리화할 수는 없지 않은가?

◇ 잡음은 藥이다

경직된 교리가 지배하던 중세의 암흑시대에 도입된 ‘악마의 대변인(Devil’s advocate)’이라는 흥미로운 제도가 있다. 성인을 추대하는 과정에서 특정인으로 하여금 후보자의 흠을 구태여 들추게 하는 것이다. 큰 경사의 분위기에 휩쓸려 잘못된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미리 차단하려는 것이다.

비슷한 배경과 사고를 가진, 동질성이 강한 집단의 의사결정은 곧잘 무오류의 자기최면에 빠진다. 소위 ‘집단사고(Groupthink)’의 함정이다. 정반대의 개념으로 ‘집단지성(Collective intelligence)’이 있다. 협력과 경쟁을 통해 향상된 집단의 지적 능력을 의미한다.

집단사고와 집단지성을 가르는 분기점은 소통과 교류, 그리고 토론이다. 전략과 전술에 대한 부단한 내부 토론이 이어지고, 단순한 설명의 전달이 아니라 쌍방향 토론으로 외부와 소통하고, 외부 인력을 끌어들여 집단의 유연성을 높여야 한다. 잡음은 毒이 아니라 藥이다.

[칼럼니스트 소개]

윤영환 크레딧애널리스트 약력

2001∼ 신한금융투자 선임연구위원

1988∼2001 한국신용정보, 연구개발실장 화학산업평가실장

KAIST MBA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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