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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진칼럼]문 앞의 야만인들

김화진 서울대 법학대학원 교수공개 2018-10-22 08:00:45

이 기사는 2018년 10월 15일 10:00 thebell 에 표출된 기사입니다.

1976년에 투자은행 베어스턴즈를 나온 세 사람이 조그마한 투자회사를 하나 차린 것이 투자은행의 역사에 획을 긋는 사건이 된다. 이 해 KKR(Kohlberg Kravis Roberts)이 탄생한 것이다. 회사 이름은 창업자 세 사람 제롬 콜버그(Jerome Kohlberg, Jr.)와 그 조카들인 헨리 크라비스(Henry Kravis), 조지 로버츠(George R. Roberts)의 이름을 땄다. 지금까지 약 280건의 사모펀드 투자를 했다. 투자한 회사들의 기업가치 총합은 약 5,500억 달러에 이른다.

중심 인물은 크라비스다. 오클라호마 석유부호의 아들로 태어나 콜럼비아 경영대를 나왔다. 크라비스는 사모펀드의 LBO 딜이 네 가지 중요한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일찍이 깨달았다. 펀드를 조성해서, 잘 투자하고, 투자한 회사를 잘 경영한 다음, 잘 파는 것이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투자자 모집과 투자 대상 회사 물색에 치중했다. 우리가 ‘LP Day'라고 부르는 연례 컨퍼런스에서는 프리젠테이션을 거의 완벽하게 준비했고 투자자들과의 유대를 다지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로버츠는 특유의 설득력을 발휘해서 대형 연기금들을 유치하고 붙잡아 두는데 성공했다.

1990년대에 접어들어 사모펀드 시장이 어려움을 겪었을 때도 투자자들은 KKR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투자를 유지했다. 그간 다져온 우호적인 관계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그간 KKR이 보여준 실적 때문이었다. KKR도 투자자들과 소통 유지에 최선을 다했다.

KKR은 국내에서는 2009년에 앤호이저 부쉬 인베브(Anheuser-Busch InBev)로부터 OB맥주를 18억 달러에 인수했다. OB맥주는 우수한 경영진이 효율적으로 운영하는 회사였으므로 이 거래는 기업의 턴어라운드를 위한 구조조정형 바이아웃이 아닌 전통적인 LBO거래였다. 이러한 KKR의 전략 변화는 글로벌 사모펀드가 한국의 미래에 대한 신뢰를 갖는 장기투자자로 성격이 변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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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KR은 투자자들로부터 자금을 모아 재무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있거나 잠재가치에 비해 저평가된 회사를 큰 부채를 일으켜 인수하고 고강도의 구조조정과 경영성과를 통해 가치를 상승시켜 다시 매각하는 LBO기법을 시장에 선보였다. LBO는 KKR보다 몇 해 앞서 1969년에 깁슨그린(Gibbons, Green & van Amerongen)이라는 펌이 처음 선보인 바 있으나 LBO를 본격적인 구조조정 기법으로 정착시킨 것은 KKR로 인정된다.

KKR은 1989년에 오레오, 리츠 같은 쿠키로 잘 알려진 RJR나비스코(Nabisco)를 250억 달러에 인수하면서 대중적인 명성까지 얻었다. 2006년에 KKR도 참여한 HCA 딜(316억 달러)이 나오기 전까지 17년간 최대 딜의 기록을 보유했던 이 딜은 월스트리트저널의 두 기자가 1989년에 책으로 내서(Barbarians at the Gate: The Fall of RJR Nabisco) 더 유명해졌다.

이 책은 베스트 셀러였을 뿐 아니라 사모펀드와 M&A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수로 읽어야 하는 명저다. HBO에서 TV용 영화로도 제작했다. 2008년에 20주년 기념 확장판이 나왔다. 이 확장판은 국내에서 번역되었는데 번역이 훌륭하다. 뉴욕타임스의 소르킨은 이 책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비즈니스 책이라고 했다. 나도 마찬가지다. 내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꼭 읽기를 권한다. 그리고 반드시 금요일 저녁에 읽기를 시작하라고 덧붙인다. 592페이지짜리 책인데 한 번 읽기 시작하면 손에서 놓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책 제목 아이디어를 나비스코 딜에서 KKR의 경쟁자였던 포츠만(Ted Forstmann)에게서 얻은 것으로 알려진다. 포츠만은 당시 LBO 딜이 활용하던 고수익 정크본드에 강한 거부감을 가졌던 사람이다. 어느 날 골프를 치다가 친구가 기업이 사모펀드에게 인수당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자 포츠만은 "성문 앞에 야만인들이 온 꼴이지"하고 대답했다 한다. 이 말은 영어에서 "문 앞의 늑대" 처럼 위험한 상황을 비유하는 경구다.

KKR은 HCA 딜 바로 다음 해인 2007년에 TXU 바이아웃으로 다시 신기록을 작성했다. TXU는 텍사스의 전력회사다. 딜 규모는 444억 달러다. TPG 캐피탈과 골드만 삭스가 동참했다. 이 딜은 아직까지도 역사상 최대의 바이아웃 딜로 남아있다. KKR은 같은 해에 257억 달러짜리 퍼스트 데이터(First Data) 딜도 성사시켰다. 퍼스트 데이터는 신용카드 프로세싱 회사다. 애플페이에 암호화 서비스를 제공한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에 인수했기 때문에 실패한 딜이 될 가능성이 높았으나 2015년 IPO로 성공사례가 되었다. 그해 뉴욕증권거래소 최대의 IPO였다.

사모펀드는 투자자들의 자금을 유치하면 그로부터 일단 보수를 받기 때문에 자본유치 자체가 사업모델인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모펀드의 본래 수익은 IPO에서 발생하는 것이다. 전업 사모펀드가 아닌 대형 투자은행의 사모펀드 사업에서는 이 점이 특히 문제가 되기도 한다. 5-7년 후의 수익시현은 나중 문제다(그 때가 되면 나는 다른 부서에 있거나 다른 회사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일단은 자금을 유치함으로써 인센티브를 향유하고 실적으로 인정받는다. 투자대상 사업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자금을 유치하고 투자압력 때문에 사업 타당성이 별로 없는 회사에 투자하게 되는 일도 종종 일어난다.

크라비스는 "어떤 바보도 회사를 사들일 수는 있다. 축하는 회사를 팔 때 받는 것이다."는 명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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